문화일반

<脫강원인 入강원인>(5·完)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 경상도사람들

황무지·지뢰밭을 옥토로 가꾼 여기가 제2의 고향

친구 집들이에 온 입주 1세대 할머니들의 기념촬영.

“뭔 비가 요로 코롬 억수로 내린다냐.” 1959년 9월17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추석 명절이다.

차례를 막 지낸 정호남(75)씨는 그칠 줄 모르는 비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경상남북도 일원을 강타한 이날 비는 사망·실종 849명, 이재민 37만3,459명을 비롯 총 1,900여억원의 재산피해를 남긴 사라호 태풍으로 재난의 역사로 기억됐다.

1959년 태풍 피해 입은 경상도 주민 70세대 집단이주로 형성

군부대 천막생활 맨손으로 고리 살 먹어가며 삶의 터전 일궈

목숨걸고 개간해 놓았더니 수십년 지난 뒤 땅주인 나타나 시련

울진군 기성면, 온정면, 평해면, 근남면 일원에서 피해를 입은 수재민 70세대가 당시 강원도지사로 재임하던 홍창섭 지사 주선으로 수복지구인 철원 마현리로 집단이주하게 됐다.

군용트럭 23대에 가족과 세간을 실은 수재민들은 울진군청에 모여 강릉을 거쳐 횡성, 춘천을 경유해 어둠이 짙게 내린 밤 화천에 도착했다.

학교 교실에서 몸을 누이고 추운 밤을 보냈다.

당시 수재민을 싣고 화천에 도착한 트럭 위에서 안저희(80)씨는 딸을 순산했다.

안씨는 비포장길 덜컹대는 트럭 위에서 550여㎞ 되는 거리를 이동하며 진통을 참아냈다.

1959년 4월7일.

3박4일 만에 최전방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 수복지구에 도착한 수재민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버드나무와 억새가 들어찬 땅과 60개의 군부대 천막이었다.

이들은 철통같은 감시하에 천막생활을 하며 변변한 장비 없이 맨손으로 농지를 개간하며 낯선 땅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도착 후 12일 만에 4·19혁명을 맞았다.

민주의거라는 거대한 수식어가 붙지만 이들에게 민주란 사치에 불과했다.

군수와 도지사 등 행정기관의 수장들이 바뀌면서 약속한 지원도 모두 사라졌다.

행정기관의 보호나 지원이 없어지자 주민들은 자치회를 만들고 농지를 분배하며 삶의 터전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왔다.

개간한 땅은 1,980∼2,600㎡가 되기 빠듯했다.

4인 가족이 1년 동안 먹기엔 턱없이 부족해 주민들은 시내에서 장리쌀을 얻어 먹었다.

한 가마를 빌려 먹으면 1년 뒤에 5말을 얹어 줘야 하는 고리의 쌀이다.

장보러 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군부대에 신청해 5명이 1조를 이뤄 단체로 행동했다.

아이를 업고 머리에 짐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군인과 똑같이 구령에 맞춰 구호를 붙여가며 행군했다.

아침저녁으로 점호를 하고 군인들의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생활하는 수재민들에게 개인의 자유나 인권은 사치에 불과했다.

1979년 대대적인 민북지구 취락구조 개선사업이 시작됐다.

마을주민들의 주택이 새롭게 단장됐다.

1970년대 철원의 최대 현안은 식량증대에 따른 민통선 북방지구 개척이었다.

그렇게 개척과 성장의 상징으로 각광받던 민북마을이 이제 4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에 어린 가족들을 데리고 황무지 땅에 정착한 어머니, 아버지들은 어느새 50년의 세월이 지나 팔순의 나이가 됐다.

입주 1세대 중 생존해 있는 남자는 이제 3명뿐이다.

2세대들 사이에는 농가소득 저하로 이농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인구 고령화와 이농은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만들고 있다.

입주 초기 아무도 찾지 않던 황무지를 지뢰를 헤쳐 가며 목숨 걸고 개간해 옥답으로 만들었더니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불쑥 땅임자라며 나타난 불청객으로 마을은 또 한 번의 사라호 태풍을 맞고 있다.

정부에서는 사유재산권 문제로 보고 적극 개입하지 않았고 그 사이 이주민들은 땅을 빼앗기는 일이 속출했다.

2004년 민통선지역에 불어닥친 부동산 광풍은 사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마현1리에 터전을 잡은 이주민 2세대들은 현재 시설재배를 통한 고득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파프리카 오이 토마토 등은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할 정도로 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해 오고 있다.

시설재배 하우스 입구에는 입주 1세대들의 노고를 기리는 입주기념비가 서 있다.

마을을 일으키고 지금의 2세대를 존재하게 한 어머니, 아버지들의 피와 땀을 잊지 않기 위해 초기 66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글·사진=김남덕기자 ndkim@kwnews.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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