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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비실이' 배삼룡 개다리춤에 배꼽 잡고 깔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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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배삼룡 춘천 방문쇼

◇1974년 5월31일 금요일 저녁 춘천 소양극장에서 '배삼룡 향토방문쇼'가 열려 배삼룡(사진 오른쪽)과 남철이 공연하고 있다.

그 시절 '텔레비전'은 요술상자

온 동네 아이들 줄 맞춰 앉아

희극배우 배삼룔 연기에 폭소만발

방송국 간 납치극 벌일 만큼 톱스타

고향 춘천 찾아 남철과 입담 폭발

극장 공연 수익은 성금으로 내기도

극장에서나 보던 공연이 상자 안으로 들어왔다. 어릴 적 TV라는 상자는 요술을 부리는 판타스틱 덩어리였다. 시골마을에서 텔레비전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저녁마다 요술상자를 만나러 가는 길엔 반드시 빈병 하나가 있어야 했다. 전기세 대용으로 받는 입장료다. 온 동네를 뒤지다시피 해 빈병을 구하면 행복감에 젖곤 했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마당에 멍석을 깔고 줄 맞춰 앉았다. 툇마루에 놓인 TV는 브라운관을 가린 차단막이 벗겨지고 꼴깍 삼킨 침과 함께 움직이는 영상이 나왔다.

1960~1970년대는 지금만큼이나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였다. 전국을 돌며 입장료를 낸 시민들만이 관람하던 코미디극이 누구나 텔레비전만 틀면 안방에서 볼 수 있게 됐다. 희극배우가 전국적 인지도를 갖는 혁명 같은 사건이었다. 1969년 MBC가 개국하자 배삼룡은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한다. 집배원 역으로 출연한 배씨는 특유의 비실비실 걷다가 넘어지는 역으로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이후 '쇼 반세기', 일일시트콤 '부부 만세'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전국 인지도를 가진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TV 출연은 배삼룡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알라딘 램프였다. 비실이 춤은 전국 아이들이 따라하는 유행 춤이 됐으며 스타를 보려고 팬들은 방송사 앞으로 몰려왔다. 텔레비전은 극단 손님을 찾아다니던 배씨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의 인기는 TBC(현재 KBS-2TV)와 MBC의 치열한 경쟁을 유발해 배씨를 방송에 출연시키기 위해 납치극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텔레비전 인기는 영화 출연도 이끌었다. 1974년 '나의 인생 고백', '형사 배삼룡', '출세작전', '애처일기', '운수대통', '아리송해' 등 10여 편의 영화에서 코미디 매력을 발산했다. 당시 코미디계의 떠오르는 스타들은 이기동, 서영춘, 송해, 배연정, 최용순 등으로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동료들이다.

1974년 배창순(배삼룡 본명)이 고향을 찾았다. 거리엔 코미디 황제를 환영하는 사람이 넘쳐났다. 나들이하기 딱 좋은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금요일 저녁 소양극장에서 향토 방문쇼가 열렸다. 다원극의 원조인 이 공연은 전국을 순회하며 열려 인기가 높았다. 남철과 배삼룡의 입담은 시민들의 폭소로 이어졌다. 노래, 코미디, 공연 등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진 공연은 시민들에게 큰 위안을 줬다.

다음 날 강원일보 사회면에 이날 공연 관련 기사가 실렸다. “박종성 도지사는 춘천 출신 연예인 배삼룡씨에게 방문패와 도정 리플릿을 선사했다. 배삼룡씨는 1974년 5월31일 향토방문쇼를 춘천 소양극장에서 공연하고 그 이득금 6만5,000원을 방위성금으로 최재영 춘천시장에게 전달했다. 이날 박 지사를 예방한 배삼룡씨는 앞으로 고향인 강원도를 위해 언제든지 힘 닿는 대로 도정에 협조하겠다고 밝히고 도민을 위해서라도 요청하면 이에 응해 열심히 고향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양구에서 태어난 배씨는 춘천초교를 졸업한 후 형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에 입학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군수품 공장에 일하다 광복 후 귀국해 1946년 전국을 떠도는 악극단을 시작으로 평생 광대의 삶을 살았다. 6·25전쟁과 더불어 육군 군예대(KAS) 입대, 1964년 라디오 방송시작과 TV 방송, 전두환 신군부의 방송출연 정지 처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3년 귀국 후 1996년 건강이 악화돼 쓰러질 때까지 연예활동을 이어 갔다. 2010년 84세로 희극인의 삶을 마감했다.

(도움말=문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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