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몽골의 ‘대명동맹' 받았더라면…조선이 요동진출 이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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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연세대 겸임교수)

◀1704년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 등이 만력제와 그의 손자이자 최후 황제 숭정제 등을 숭앙하기 위해 속리산 화양계곡에 세운 만동묘. 사진=백범흠 박사 제공

조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긴다' 이소사대

명나라 군사력에 눌려 사대주의에 중독

오이라트부 15세기 몽골 통일 후 명나라 압박

조선엔 사신 보내 동맹 제의하기도

동맹 이뤄졌다면 랴오둥 점령 국경 확장 가능성

조선-명-일본 간 세력 유지도 가능했을 것

# 조선, 자가당착에 빠지다

1392년 조선은 몽골제국의 잔해(殘骸) 위에서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긴다'라는 ‘이소사대(以小事大)' 정신의 위화도 회군(1388년)을 정치·군사적 배경으로 태어났다. 이성계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조선 건국세력은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이 한자로 화림(和林) 또는 화령(和寧)으로 표기된다는 것에 착안, 명나라에 새 나라의 국호로 화령과 조선 중 골라줄 것을 요청했다. 명(明)은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기자조선(箕子朝鮮)같이 이성계 정권이 명에 고분고분하기를 기대, ‘조선'을 골라줬다. 명의 압도적 경제·군사력에 눌린 조선 왕과 사대부들은 서서히 사대주의와 더불어 성리학적 화이관(華夷觀)에 중독돼 갔다. 고려가 사용했던 황제, 천자 같은 용어를 제후를 뜻하는 왕으로 바꾸고, 자주의 상징인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조선인 자체가 북송(北宋) 소식이 ‘맥적(貊狄)'이라고 부르던 ‘비한족(非漢族) 오랑캐'임에도 불구, 성리학 사대부들은 한족을 제외한 여타 동아시아 종족 모두를 오랑캐로 여겼다.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성리학 사대부들에게 있어 한족의 명나라는 롤 모델이었으며, 세계를 보는 척도(尺度)이기도 했다. 한편,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가 1399년 옌징(베이징)에서 수도 난징의 건문제에 대항, 반란을 일으키자 조선도 여기에 휘말렸다. 1402년 여진족 출신 건문제파 장군 임팔라실리가 2만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 입국을 요청했다. 임팔라실리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최강을 포함한 요동 고려인(조선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주체와 충돌하지 않으려고 임팔라실리 등 일부를 나중 주체에게 넘겨주었다. 태종은 명나라 내란이 4년간이나 지속됐는데도 불구,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요동 정벌을 주장한 정도전을 죽이고 집권한 이방원으로서는 정권 안정을 위해서는 명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체든, 건문제든 어느 한쪽 편을 들 수가 없었다. 주체의 쿠데타가 일어난 50년 뒤 조선에도 유사한 사건(계유 쿠데타)이 벌어졌다. 사신으로 옌징을 방문한 적 있는 세조 이유는 주체의 사례를 통해 정권 찬탈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영락제로 등극한 주체의 후궁 가운데 하나인 한씨(韓氏)의 조카가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 이혈의 어머니 인수대비다.

# 명나라의 부흥

중원에서 축출된 몽골의 부흥은 신속했다. 명나라의 대응도 빨랐다. 북원군(北元軍)이 남옥(藍玉)의 명군에 대패한 1388년 후룬베이얼 전투 이후 칭기즈칸 가문 보르지긴씨족은 세력을 잃었다. 북원에 대신해 타타르부(러시아의 투르크-슬라브계 혼혈 타타르인과는 상이)가 대두했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를 수도로 하는 티무르 제국의 지원을 확보한 타타르부 족장 벤야시리는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도전했다. 영락제는 1409년 구복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타타르부를 치게 했으나, 명나라군은 케룰렌강 전투에서 타타르군에게 전멸 당하고 말았다. 1410년 영락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 동북몽골 오논강 유역에서 타타르군을 격파했다. 타타르부가 약화되자 몽골 서북부와 북신장(北新疆)을 근거로 한 오이라트부가 세력을 키웠다. 명은 압도적 경제력에 기대어 이웃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주는 것이 받는 것에 비해 2~3배는 더 됐다. 조선과 류큐, 몽골, 만주, 동남아, 신장 포함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양 연안 국가들이 조공했다. 명은 거대한 생산력에 기초한 조공무역의 힘으로 명 중심 동아시아 질서를 만들어 나갔다. 영락제는 1421년 수도를 난징에서 옌징으로 옮겼다. 이로써 중국은 몽골과 만주, 한반도 동향에 극히 민감하게 됐다. 연왕(燕王)으로 베이징을 다스려 본 적 있는 영락제는 몽골과 중국의 정치적 분리가 야기한 몽골 부족들의 경제난이 몽골-명나라 간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몽골 원정을 통해 막남(漠南·중국)과 막북(漠北·몽골)을 다시 통일할 계획이었다. 영락제의 아들 홍희제는 영락제가 주도한 여러 차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몽골 세력이 꺾이지 않자 주원장의 건국이념으로 돌아가 수축형 민족국가를 지향했다. 그는 난징 환도(還都)를 시도했다. 홍희제의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았던 까닭에 환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홍희제를 계승한 선덕제는 주원장의 수축형 민족국가와 영락제의 확장형 세계제국 사이에서 중간을 선택했다. 환도는 중단했으나 몽골 쪽 국경수비대를 허베이성 중북부까지 후퇴시키고, 반란이 잦은 베트남은 포기하기로 했다. 선덕제가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한 것이 그의 아들 영종 시대에 재앙으로 나타났다. 영종은 사부(師父) 환관 왕진을 중용해 2인자로 삼았다. 왕진의 위세는 상서(장관)의 무릎을 꿇릴 정도였다.

# 명 압박하는 몽골…조선에게 찾아온 기회?

명에서 영종이라는 어리석은 지도자가 등장한 때 몽골 오이라트부에는 에센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몽골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압박했다. 몽골은 마시(馬市)라는 조공무역을 통해 명나라에 가축을 수출하고, 식량과 차 등을 수입해 살아갔다. 조공무역은 경제적 약자인 몽골에게 유리하게 진행됐다. 조공무역이 재정에 과도한 부담을 주고 왕진 개인에게도 손해가 되기 시작하자 명 조정은 몽골의 조공을 제한하려 했다. 에센은 1449년 랴오둥에서 간쑤에 이르기까지 몽골-명 국경 전체를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에센이 옹립한, 보르지긴씨족 출신의 허수아비 대칸(大汗) 톡토아부카는 별동대를 이끌고 대흥안령(大興安嶺)을 넘어 만주의 여진 부족들을 공격했다. 에센의 주력군이 베이징에서 멀지 않은 산시성 요충지 따퉁(大同)마저 공격하자 왕진의 재촉을 받은 영종은 친정(親征)을 결정했다. 에센 군단의 위력을 잘 알던 병부상서 광야와 병부시랑 우겸이 친정을 만류했으나 영종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영종은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고, 동생 주기옥을 감국(監國)으로 삼아 우겸과 함께 베이징을 지키게 했다. 영종의 친정(親征)은 비극으로 끝났다. 명군 50만은 장거리 행군 끝에 물이 없는 베이징 교외 토목보(懷來 남쪽)에서 오이라트 4만 기병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포위된 명나라군 수십만이 학살당했다. 영종은 포로가 되고, 왕진과 광야는 살해당했다. 오이라트는 곧바로 옌징을 포위했다. 오이라트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제의했다. 우겸은 주기옥을 황제로 추대하고, 22만 병력과 각종 화기(火器)를 곳곳에 배치해 주야 5일간의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오이라트는 조선군을 포함한 명 지원군에 의해 퇴로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해 몽골로 퇴각했다. 오이라트가 대명(對明) 동맹을 요청하고 옌징성을 포위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 조선 세종은 압록강, 두만강 건너편 어느 한 곳도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조선은 당시 명나라의 쇄국정책을 본받아 섬 주민들을 육지로 불러들이는 쇄환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조선은 오이라트의 침공으로 멸망 위기에 처한 명이 조선군의 요동(랴오둥) 주둔과 함께 여진족 준동 억제를 요청한 기회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오이라트군의 압록강 도하(渡河)에 대비해 평북 강계에 대군을 주둔시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에 앞서 압록강 유역 4군, 두만강 유역 6진을 개척한 것이 조선이 얻어낸 전부였다. 6진은 윤관, 척준경이 남긴 유산이기도 하다. 오이라트가 대명(對明) 동맹을 요청해 왔을 때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조선, 명, 몽골 간 국경이 접하던 요충지 다링허(大凌河) 이동, 이른바 랴오둥을 점령했어야 했다. 다링허(大凌河)-랴오허(遼河)로 국경을 삼았어야 했다. 옌징과 가까운 랴오둥 공략이 부담스러웠다면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李澄玉)으로 하여금 두만강 북안(北岸) 지린과 헤이룽장, 연해주를 점령하게 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나중에라도 조선과 명, 일본 간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조선은 1550년 알탄칸이 이끄는 투메트부 몽골 군단의 옌징 포위 시에도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명나라를 하늘로 생각한 조선의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와 세조, 한명회, 권람 등이 주도한 1453년 계유 쿠데타 이후 되풀이된 정변과 사화(士禍)는 조선의 왜소화를 가져왔다. 조선은 육지로나 바다로나 바깥으로 진출하는 것을 꺼리는 폐쇄적인 나라가 됐다. 성종 대 이후 김종직, 조광조. 이황, 이이, 송시열 등 명나라를 세계 유일의 문명국이자 하늘로 생각한 사림파(士林派)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면서 조선의 자주성은 지속 약화돼 갔다. 이황과 이이, 송시열의 성리학은 중국 중심 세계관을 고착시키고, 인간을 혈통을 기준으로 귀족과 평민, 노예로 구분한 신분제도를 영구화시켜 조선사회를 오히려 퇴보시켰다. 이황과 이이 등 우리 민족과 국가 융성에 기여한 것이 거의 없는 인물들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지폐를 차지하고 있는 아이러니(irony)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지폐 인물들을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강한찬, 이순신 등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 변질된 사대주의

명에서는 무능한 정덕제, 가정제, 융경제를 거쳐 융경제의 3남 주익균이 10세 나이에 만력제로 즉위했다. 만력제 때 일본의 조선 침공(임진왜란), 만주족의 부상(浮上) 등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는 일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만력제가 조선 파병을 결정,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선 왕조를 다시 세우는 데 도움을 줬다(재조지은, 재조번방)는 이유로 자자손손 그를 숭앙했다. 외교정책에 그쳤어야 할 사대(事大)가 국가윤리로 둔갑하고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악용되더니 마침내 조선 사대부 전체의 정신세계를 혼란으로 몰고 가는 집단광기(集團狂氣)로 변질됐다. ‘빨갱이', ‘토착왜구' 논란도 이와 다르지 않다. 1704년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 등이 만력제와 그의 손자이자 최후 황제 숭정제 등을 숭앙하기 위해 속리산 화양계곡에 세운 만동묘(명나라에 대한 충성을 뜻하게 된 만절필동에서 유래)도 그중 하나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허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명나라를 향한 조선의 절개와 충성심은 꺾을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송시열을 추앙하는 ‘송자(宋子)사상선양사업회'가 1993년(단기 4326년) 세운 속리산 화양동사적비에는 19세기말 대원군 이하응이 단행한 서원 철폐를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는 등 우리 사회 일각에는 18세기 초 성리학 사대부들이 가졌던 중화존숭주의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연세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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