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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죽음 문턱서도 나를 고문한 ‘이근안' 이름 석자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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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어부 간첩사건 최초 무죄 받은 김성학(속초)씨

◇속초 김성학씨는 1971년 오징어잡이 어선 승해호 선장인 아버지를 따라 함께 배를 탔다 납북됐다. 귀환 후 간첩 혐의를 받고 경찰과 보안 당국에 갖은 고초를 당했고 방위병으로 근무하던 1974년 북파공작원 훈련 부대인 HID에 끌려가 지옥 같은 훈련을 받았는가 하면 정보 경찰에 의해 경기도경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으로부터 갖은 고문을 받아야 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은 지금까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72일간의 감금 동안 잔혹했던 전기고문을 떠올리며 김성학씨는 눈물을 쏟았다. 속초=권태명기자

1971년 오징어잡이 선장 부친과 함께 北에 나포 1년만에 풀려나

신원 회복에 속아 북파공작원 입대, 지옥같은 훈련에 자해까지

영문도 모른 채 경기도경 대공분실 끌려가 72일간 고문 시달려

척추 녹아 걷지도 못할 지경… 고문경찰 16명 고발 역사의 단죄

납북귀환어부 김성학(71·속초)씨의 사연은 한 사람의 삶이 맞는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극의 연속이었다.

1971년 오징어잡이 고깃배의 선장인 아버지를 돕기 위해 조업에 나섰다가 부자가 함께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 1년여 만에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곧 숨을 거뒀고 자신은 HID(북파공작원)로 차출된다. 공작원 훈련이 끝난 후에는 고문경찰 이근안에게 72일간 불법 감금돼 전기고문을 당하며 간첩으로 조작된다.

하지만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내며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 최초로 무죄를 받아냈다. 그는 이근안과 고문경찰 16명을 고발했다. 결국 이근안은 김성학씨와 고(故)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고문한 사실이 인정돼 역사의 단죄를 받게 됐다.

김성학씨는 강원일보 취재진을 만나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 수차례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을 찾기 어렵다면 국가가 일괄적으로 이들을 복권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강하게 주문했다.

■1971년 비극의 시작=18세에 상경해 전자기술을 배우던 김씨는 1971년 8월 오징이잡이배 선장인 아버지를 돕기 위해 잠시 속초에 내려와 고깃배에 올랐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울릉도 인근에서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김씨와 그의 아버지, 23명의 선원은 공해상에서 북 경비정에 나포된 후 1년 만에 풀려난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는 여느 납북귀환어부들이 그랬듯이 수사기관에 연행돼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수사기관에서는 ‘북한에서 받은 지령을 내놓으라'며 강하게 압박했다. 다행히 그는 별다른 혐의 없이 풀려났으나 선장인 아버지는 1년을 복역했고 얼마 못 가 50대 이른 나이에 숨을 거뒀다.

강제로 HID 입대=고향으로 돌아온 후 1973년 그는 군에 입대했다. 제대를 앞둔 마지막 휴가 도중 그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들에 의해 납치됐다. 그들은 김씨에게 HDI(북파공작원) 입대를 제안했다. 김씨는 “다시는 북에 가고 싶지 않다”며 단칼에 거절했지만 그들은 ‘북파공작원으로 다녀오면 감시 대상에서 제외하고 신원을 회복시켜 주겠다'고 구슬렸다. 1년간 지옥 같은 훈련을 버텨야 했던 김씨는 자해 등 극단적 시도까지 하게 됐고 결국 실제 작전 투입없이 풀려났다.

직장까지 찾아온 감시의 눈=북파공작원 훈련까지 받아들였지만 ‘요시찰 대상'이라는 꼬리표는 여전했다. 그는 번듯한 직장을 구했지만 경찰이 직장까지 찾아와 상사에게 ‘북에 다녀온 사람이니 잘 감시하라. 수상한 점은 없었냐'고 추궁했다. 경찰이 김씨의 집에 침입해 사진이나 집기를 모조리 가져가는 일도 있었다.

동료들은 김씨를 피했고 결국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누구든 잡아넣으면 빨리 출세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주 좋은 사냥감이었다”고 말했다.

납치·고문에 죽음의 문턱을 넘다=김씨는 경기 하남으로 이주해 성실히 전파사를 운영했고 1985년에는 유명 가전제품 브랜드 대리점 계약까지 땄다. 당시 가전제품 붐으로 돈도 모았고 결혼해 딸도 출산했다. 오랜 고통 끝에 행복과 희망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딸 출산 후 3개월여 만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1985년 12월2일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복면이 씌워진 채로 납치돼 경기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대공분실에 도착하자마자 발가벗겨졌으며 경찰은 잠을 재우지 않고 밥도 주지 않았다. 2명이 교대로 감시하며 움직이면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전기고문이었다. 2m가량의 칠성판에 몸을 눕혀 7개의 벨트로 묶고 담요로 감싼 후 발가락 사이에 침을 꽂아 온몸에 전기를 통하게 했다. 72일간의 감금기간 6번의 전기고문을 당하며 척추 디스크가 녹아내려 걸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악몽 같은 전기고문을 떠올리며 김씨는 눈물을 쏟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납북어부 간첩사건 최초 무죄=경찰은 당시 김씨의 지인 40여명을 증인으로 조작했고 폭행과 고문에 의한 김씨의 진술을 토대로 그를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진술만 있을 뿐 간첩이라는 증거는 없었고 증언이 조작된 사실을 파헤친 가족의 노력 등으로 재판부는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씨는 수사기관에 납치·감금된 이후 8개월 만에 풀려났다. 3년간의 법정다툼 끝에 1989년 대법원도 김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 최초의 무죄 판결이었다.

고문기술자의 이름을 듣다=대공분실에서 잔혹한 고문을 겪던 당시 경찰 중 1명은 남몰래 김씨를 돌봐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외비였던 이근안을 비롯해 고문경찰 16명의 이름을 김씨에게 알려줬다. 이름을 알려준 경찰은 김씨가 풀려나면 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반드시 고발하라고 말했다. 이 경찰은 고문과 폭행으로 죄 없는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가는 행위에 가책과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김씨는 계속되는 고문에 정신을 잃으면서도 이들 16명의 이름만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무죄 확정 후 이들을 고소한다. 72일간 감금당하며 겪은 끔찍한 일을 145장이나 써냈다. 당시 김씨 외에 이근안을 같은 죄목으로 고발한 이가 또 있었고 김씨는 법원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고(故)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다.

그러나 고문경찰 고발사건의 담당검사는 자신을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의 그 검사였다. 이의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검찰은 ‘국가에 충성하며 벌어진 일'이라며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

10년 만에 받아들여진 재정신청=10년 뒤인 1998년 극적으로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졌고 이근안은 납북어부 김성학씨와 김근태 전 의장을 고문한 죄가 인정돼 7년형을 선고받았다. 수많은 납북어부를 간첩으로 내몰고 폭행·고문한 고문경찰들이 역사의 단죄를 받게된 것이다.

김씨는 “과거 공안, 수사기관에서 출세욕 때문에 (간첩을 조작해) 결국 많은 사람이 다쳤어. 유무형으로 괴롭힘 당하고…. 국가가 이제라도 알았으면 일괄적으로 이들의 명예를 회복해줘야 해. 나처럼 법에 호소해서 무죄를 받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아. 이제 국가가 깨닫고 직접 나서야지”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최기영·이현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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