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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스승의 날, 역사의 뒤안길에서 은사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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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돈설 강릉문화원장

반백년 지난 가르침

아직도 선명히 기억

더 강건하시길 축원

늘 존경하는 은사님! 복숭아꽃 향연이 가득하더니, 벌써 겨우내 움츠렸던 이팝나무에 새하얀 꽃망울이 기지개를 켜며 강릉 가로수길을 신록처럼 싱싱하게 바꾸어 놓네요. 그동안 내외분 균안(均安)하신지요? 저는 전통문화의 꽃을 피우고, 현대문화의 결실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문득 내일이 '스승의 날'이어서 은사님의 고매하신 모습이 떠오르네요. 몸은 비록 종심(從心)이어도 마음은 철없이 꿈을 먹던 철부지 소년의 심정입니다.

공부하기 따분할 땐 역사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고, 제자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크게 떠서 절절하게 역사의 숨결을 느끼곤 했지요. 그 당시 은사님께서는 정조와 수원화성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 대목을 놓칠 수 없어 몇 년 전, 수도권 탐방여행 중 수원 팔달산 정상의 화성장대(華城將臺)에 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조와 수원화성과 다산은 역사의 필연 같습니다. 정조가 개혁정치의 이상을 품고 착수한 것이 화성 건설사업이었고, 정조의 명을 받아 화성 축조의 설계를 맡은 실무책임자가 다산 선생이니까요. 왕명을 받은 다산이 31세 나이에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공법으로 화성을 설계하여 공기 7년을 단축해 오늘날 유려하고 실용적인 '성곽의 꽃'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다산의 지혜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만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구세력의 등장과 개혁정치의 몰락, 정조의 신임을 받던 다산 선생은 40세 한창 일할 나이에 귀양길에 올라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떠났지요. 그러나 다산은 남달랐습니다. 은사님의 말씀대로, 유배생활 중에 다산이 보여준 자세는 절망과 고행을 딛고 일어선 초인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극한적인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긍정적인 자세로 희망을 찾았습니다. 한양에서 천리길, 전라도 강진의 후미진 다산(茶山)에 초당을 짓고 저술작업과 제자 육성에 몰두했고, 때때로 시음(詩吟)과 소요(逍遙)로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생강을 씹으며 어지러운 세상을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활발한 창조활동으로 불후의 업적을 남긴 다산의 생애는 어쩌면 거룩한 구도자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은사님께서는 다산 선생의 스토리를 갈무리하시고, 제자들에게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꼭 읽고 용기 내라며 아래와 같은 맹자의 명언시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어떤 사람에게 내리려 할 때는(天將降大任於是人也)/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의지를 지치게 하고(必先其心志)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苦其筋骨)/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餓其體膚)

그 생활은 빈궁에 빠뜨려(窮乏其身行)/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라(拂亂其所不能)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참을성을 길러주며(是故, 動心忍性)/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增益其所不能)”

반백 년도 지났지만, 은사님께서 가르침으로 주신 이 맹자의 명언, 아직도 제 가슴속에 입력돼 있습니다. 세상 명리(名利)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설파하며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소망했던 스승님. 지(知)·덕(德)·애(愛)가 어우러진 가르침이었기에 제자들은 그것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았으며, 오늘날까지 그 가르침들은 삶의 근본이며 혜안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방황도 하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은사님의 가르침으로 응달지던 제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도 자주 맛보았습니다. 스승님의 은혜, 역사의 뒤안길에 되새깁니다. 5월 스승의 날을 맞아 은사님께서 더욱 강건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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