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언중언]‘영어권력’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포고 제5조는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였다. 적어도 미 군정청을 둘러싼 임시정부 주변의 공식 언어는 영어였다. 지주 집안으로 일찍이 구미 유학 기회를 잡은 사람들, 미 선교사와 어울려 영어 좀 쓴다는 이들이 득세했다. 군정청이 잠시 운영한 군사영어학교 출신들도 48년 건국 후 대부분 고위 장성으로 승진해 창군 주역이 됐다. 유창한 영어가 곧 정치권력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중국과 동아시아 문제에 밝았던 미 언론인 에드거 스노는 그런 해방정국을 ‘통역관 정치’라고 비꼬았다. 그때 활동한 수백 명의 통역관은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나 총리실의 핵심 보좌관들이었다. 즉 권력의 심장부에서 일했다. 6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영어의 기세는 더욱 하늘을 찌른다. 지나친 사교육 열풍을 걱정하는 ‘영어 망국론’이 나오는가 하면, 사실상의 세계어를 어릴 적부터 한글처럼 가르치자는 ‘영어 공용화론’ 주장도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해외 유학과 영어연수가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 편입해 살아가기 위한 자격증으로 탈바꿈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특히 방학 때면 초등학생들까지도 해외 영어연수가 붐을 이루고 있다. 2005년에만 6,000여 명이 영어권 국가 등으로 유학을 떠났다. 조기 유학생의 95%가 영어연수를 한다고 보면 된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마을을 늘리고, 원어민 교사를 더 채용할 계획이라지만 조기 유학생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영어교육은 고비용 저효율의 한 상징이다. 한국공무원의 대개가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고 문서작성도 못해 업무에 지장이 있다는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당국자의 지적이 우리의 영어현실을 그대로 웅변해 주고 있다. ▼정선의 예미초등학교가 지난 8일 교내에서 제2회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배 영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회에는 엄격한 예심을 거친 15명이 나와 유창한 영어회화 솜씨를 겨뤘다. 글로벌 한국의 갈 길을 산골 폐광촌의 고사리 손들이 일궈내고 있다.권혁순논설위원·hsgweon@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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