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중언

[언중언]국장과 국론

“…// 크고도 빛나도다(皇哉凞哉)/ 그 다스림 넓고 커서(大治廣博)/ 유풍이 오래 가리로다(遺風邈哉).” 삼척 해변 육향산에 있는 '척주동해비'에 적혀 있는 '동해송(東海頌)' 마지막 구절이다. 이 비는 1661년 삼척부사 미수 허목(許穆)이 세웠다. 당시 폭풍과 해일 피해가 잦아 어민들은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부사가 재해 방지책, 바다를 달래고자 222자의 사언고시 비문을 짓고 직접 글씨를 썼다. 이를 오석에 새겨 바닷가 산기슭에 올려놓았다.

▼미수가 삼척부사로 온 것은 좌천이었다. 조선 17대 임금 효종이 승하해 국상이 났다. 이에 계모인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대신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효종이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라며 1년상을 주장했다. 반면 남인들은 3년상을 제기했다. 사헌부 장령 허목은 차자로 출생했다 하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될 수 있다는 차장자설을 내세웠다. 왕위를 이어받은 현종이 선대왕 시절 정권을 좌지우지했던 남인들을 견제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결국 예론(禮論)을 정리해 놓은 당시의 '경국대전'을 근거로 1년상으로 결정됐다. 이로써 서인들이 정권을 쥐었다. 남인의 거두 미수가 삼척부사로 밀려난 연유다. 이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서인과 남인들 간에 또다시 논란이 일었다. 자의대비가 며느리의 상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이번에는 남인들이 이겼다. 현종이 장인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청풍부원군의 묘가 춘천 안보리에 있고 장례에 쓰였던 상여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두 차례 예송논쟁은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척주동해비가 세워진 내력에서 읽듯 당시는 가뭄·홍수·냉해·태풍·병충해, 5재(災)가 온 나라를 한꺼번에 덮친 상황이었다. 백성은 굶주림에 시달리는데 대부들은 권력 쟁취에 혈안이 돼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가 국장으로 치러진다. 경제난, 경기침체로 서민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를 헤아리라는 역사의 훈계다. 위국위민(爲國爲民) 국론이어야 한다.

용호선논설위원·yonghs@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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