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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정명훈, 정치용

프랑스가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건립해 19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200주년에 맞춰 개장한 오페라극장의 초대 음악감독 겸 지휘자가 선임되자 세계 음악계가 귀를 의심했다. 36세 한국인 정명훈이었다. 이듬해 3월17일 바스티유 국립 오페라단의 개막 공연에 청중의 기립박수가 15분간 이어졌다. 정명훈이 4시간36분 동안 장엄하게 연출해낸 '트로이 사람들' 연주에 감동한 갈채였다. 이튿날 '르몽드'에는 “정명훈의 지휘로 바스티유 오페라는 혼을 찾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몇 해 전 바스티유 광장을 지날 때 씁쓸했던 기억이 새롭다. 프랑스 정부가 문화훈장을 줬던 정명훈이 5년 만에 쫓겨나다시피 자리를 내준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 씨의 천재적 음악성을 알아봤던 미테랑(사회당) 정부가 퇴각하고 새 정권이 들어서며 불상사가 벌어졌다. 신임 단장이 정 씨의 음악감독 권한을 박탈하고, 계약기간을 앞당기자며 재협상을 요구했다. 정 씨는 재협상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를 이유로 일방적으로 해고됐다.

▼교향악단에서 음악감독은 레퍼토리 선정, 객원 지휘자 및 연주자 선택, 솔리스트 선정, 음악회 진행에 이르는 모든 책임을 지는 절대자다. 정명훈이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고 단원들과의 관계가 좋았음에도 중도하차 한 것은 결국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를 두고 대부분의 프랑스 언론이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프랑스 2채널'은 “정부가 프랑스의 도덕을 떨어뜨렸다”라고 비난했다.

▼원주시가 시립교향악단을 상임지휘제로 바꾸겠다며 지휘자 공개 채용 공고를 냈다. 반석에 올려놓은 정치용(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명예 음악감독과의 결별 수순이다. 정 감독은 “사무적인 전화 한 통으로 마무리돼 가슴이 아프다”며 “연봉을 낮춰서라도 원주시향을 맡아 봉사하려는 생각을 했었다”고 밝혔다. 원주 출신인 정 감독은 차세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지휘자다. “지휘봉이 흔들리면 음악의 영혼이 진동하기 시작한다”는 '안동림의 불멸의 지휘자(웅진지식하우스 간)' 카피가 눈에 깊이 박힌다.

용호선논설위원·yonghs@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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