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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모래시계'의 추억

1995년 2월16일, 낮부터 한국사회가 술렁거렸다. 직장인들은 일찍 퇴근해 곧바로 귀가했다. 어둠이 밀려오자 상가와 술집이 문을 닫았고 밤거리는 한산했다. TV 드라마 '모래시계' 최종회 방송 때문이었다. 시청률 64.5%, 주인공 태수가 사형집행을 앞두고 친구인 검사 우석과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75.4%에 달할 정도로 이목이 쏠렸다. AP통신은 이 특이한 현상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모래시계'는 금기로 여겨졌던 1980년대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정공법으로 보여줘 눈길을 끌었다. 거기에 우정과 사랑, 음모와 폭력, 축재와 좌절, 눈물과 증오, 열정과 굴복, 삶의 의지와 죽음 등의 세상사를 배합해 흥미를 더했다. 굴절된 정의와 질곡의 역사·세월 묘사가 사회적 반향을 불러와 신문 1면 헤드라인에 오르는가 하면 사설로도 다뤘다. 시론·논단·칼럼도 줄을 이었고 방송위원회가 사회적 영향을 다룬 토론회를 마련할 정도였다. '모래시계 세대'라는 용어도 나왔다.

▼24부작 '모래시계'의 단 한 장면이었다. 여주인공 혜린이 수심에 싸여 고뇌하는 장면의 배경으로 스쳐간 등 굽은 소나무였다. 강릉 정동진역, 바닷가 철로 변에 서 있는 '모래시계 소나무'다. 이로 인해 스산했던 탄광지 어촌 정동진은 일약 관광명소로 부각됐다. 간이역은 밤기차를 타고 와 바다에 접한 백사장에서 해돋이를 즐기려는 관광객을 연일 쏟아냈고 마을은 불야성을 이뤘다.

▼21세기, 새로운 밀레니엄 상징물로 정동진에 12억 원을 들인 대형 모래시계가 설치됐다. 2000년 1월1일 0시부터 작동한 이 모래시계에서는 8톤의 모래가 1년에 걸쳐 흘러내렸다. 이 시계가 최근 멈춰섰다. 유지·가동비를 후원했던 민간업체가 올해부터 지원을 중단했기 때문이란다. 다가오는 시간은 분명 기회다. 이제 정동진에는 시간, 그 미래가 없다. 에디슨의 충고다. “변명 중에 가장 못난 변명은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이다.”

용호선논설위원·yonghs@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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