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新 강원기행](42)정선군 북면 구절리

끊어진 철길 위로 레일바이크 달리니

굽이굽이 아홉굽이 인생도 '유유자적' 합니다

정선군 소재지인 정선읍에서 국도 42호선을 타고 자동차로 20여분을 달리다 북면 (5월1일부터는 여량면으로 행정명칭이 변경된다) 소재지로 들어서기 전 다리에서 좌회전해 10여분을 달리면, 구절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아스팔트 2차선 도로가 송천을 끼고 형성되다보니, 푸르른 4월의 모습마냥 드라이브 코스로도 제격이다.

큰 바윗돌 사이로 강이 흐르고, 그 옆으로 우거진 산림에는 드문드문 만고의 세월을 이겨낸 아름드리 소나무숲도 보인다.

철길을 건너 물어 물어 도착한 곳은 소담한 마을 구절리.

작은 분지 형태속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마을이 들어섰는데, 생각지도 않게 생기가 넘쳐난다.

레일바이크(Rail Bike)를 타러 전국 각지에서 모인 관광객들 때문이다.

여기의 철도 레일을 달리는 건 칙칙폭폭 옛 새마을열차도 아니고, 쌩쌩 지나는 고속열차도 아니다.

온전히 인간의 운동력만으로 철길을 미끄러지며 나간다.

2명이건 4명이건 합쳐진 운동력이 페달을 거쳐 바이크의 바퀴에 전달되며 앞으로 나아간다.

하나 자전거(Bicycle)가 길을 정하지 않은 채 탑승자의 의지대로 가는 것이라면, 여기 레일바이크는 정해진 철로를 따라 갈 뿐이다.

하여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를 외칠 필요도 없다.

온전히 허벅지에 힘을 주고 페달을 밟으면 될 일이다.

어느 순간 도착지에 다다른다.

힘들이지 않아도 좋다.

8km구간의 코스가 경사도 없이 완만하다보니 정말이지 미끄러지듯 달린다.

페달을 밟고 가다 보면 계곡도 터널도 산림도 지나고 논밭을 가로질러 어느덧 목적지다.

그래서 레일바이크는 그 운동 특성도 그러하거니와 유유자적한 삶을 꼭 빼닮았다는 생각을 지울길 없다.

그러고 보니 레일바이크가 이 마을 구절리(九折里)에 들어선 건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듯 싶다.

구절 1,2,3리 마을 주민들의 삶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 8년째 구절3리 마을 이장일을 보는 김충호(56)씨는 “태풍 매미 때 마을 도로가 끊기고, 산사태가 나고 연락이 두절됐는데, 다른 곳이라면 아우성을 쳤을 거예요.

한데 이 마을은 ‘뭐 언젠가는 다시 길 뚫리겠지’다들 그렇게 생각했죠.

참 사람들 성품들이라곤.

또 얼마전에는 마을에 가로등 달아달라고 건의했는데, 시간이 좀 걸려도, 뭐 언젠가 달아주겠지.

뭐 정말이지 사람들이 다들 그럽니다.

소위말해서 주민간에 뭐 일러바치는 일 안하는 곳이 바로 여기예요.”

김씨 그 자신의 삶도 그러한데 사실 그는 마을에서 기인으로 통한다.

15년 전 서울에서 작지만 그래도 IT업체 사장을 했는데, 그의 말마따나 ‘한순간 귀신에 홀려’ 구절리에 정착했다.

“친구가 강원도 정선 놀러가자고 해 왔는데, 뭐에 씌였는지 때마침 지금 제가 사는 이 허름한 집이 나왔다기에 그날로 얼른 계약하고, 회사일은 까마득히 잊고 눌러 앉았죠” 그는 구절리에서 딱 자기와 지인들 먹을 양만큼의 장뇌삼을 심고, 간간이 이곳저곳의 마을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소일을 하며 산다.

결코 밥벌이가 될수 없는 일인데, 욕심부리지 않으며 살다보니 여태껏 왔단다.

구절리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 이곳 구절리라는 마을은 명주군 왕산면에 속해 있다.

1973년 7월1일 행정구역 개편때 현재의 정선군 북면으로 편입됐다.

구절이란 명칭은 이곳을 흐르는 하천이 유천리강과 어우러져 구절양장(아홉번 굽은 양의 창자)의 형태로 흐른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산길이 하도 꼬불꼬불해 붙여진 이름일 터이다.

지금은 강을 따라 도로가 개설됐지만, 예전에는 구절이란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순녀(여·70)씨는 “37년전 평창에서 이 마을로 이사를 올 때 화물차에 아들 녀석을 껴앉고 오는데, 얼마나 서럽던지, 또 길은 왜 이리 꼬불꼬불하던지”라며 말을 열었다.

이씨 가족에게 구절리는 열심히 일하면 배를 주리지 않아도 되는 희망의 땅이었다.

남편과 이씨는 같이 구절리에 있던 광업소에서 석탄부로 일을 해 3남매를 다 키워냈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밥먹는 날보다, 못먹는 날이 많았는데 여기는 그게 아니었다.

그러던 1972년의 일이다.

“탄차에 탄 올리는 일을 했는데, 갑자기 산더미같은 양이 내게로 굴러떨어졌지.

그리곤 기억을 잃었어요.

다들 죽는 줄로만 알았지.

하지만 꼬박 3일을 깨어나지 못하다 기적같이 눈을 뜨고는 대뜸 의사에게 던지 한마디가 ‘선생님! 밥도 안주고 나를 잡으려(죽이려)합니까’였어.” 그녀는 그 일을 회상하며 지금도 배꼽을 움켜잡고는 큰 소리로 웃는다.

채순자(69·여), 임복순(74·여)씨는 각각 30∼40년전 전라도 무안과 춘천시 소양로에서 이곳으로 와 정착, 탄광일을 하던 남편과 자식들을 올곧게 키워냈다.

하지만 채씨는 아직도 둘째 아들을 장가 보내지 못한 것이 요즘의 걱정거리라고 말했다.

손선녀(72·여)씨와 김성년(75)씨 부부도 강릉 왕산에서 농사일을 하다, 광부일을 얻으려 7살된 아이를 안고 이곳에 정착했다.

탄광일을 하던 많은 남자가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을 등졌지만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부부가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고, 또 행복이라 했다.

# 박경호(48)씨는 마을버스 운전사겸 구절1리 이장일을 맡고 있다.

그는 탄광시대를 그렇게 기억했다.

“탄광이 진행되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기차가 하루 7번씩 드나들고, 버스는 정식 버스가 3번씩이나 들어왔는데, 정부의 석탄합리화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지며 교통수단도 쇄락해갔다”고 했다.

박씨는 형님에 이어 노추산 마을버스 기사일을 하며 북면 아우라지와 구절리만을 하루 6회씩 왕복한다.

그는 한때 마을 주민이 5,000여명에 달했지만, 이제는 구절리 3개리를 다 합쳐봐야 600여명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구절리 우체국에서만 30여년을 근무한 이금의(69)씨, 박환옥(65)씨 부부는 마을의 흥망을 옆에서 지켜본 인물이다.

이씨는 “신영광업소가 한창일 때에는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들었고, 이들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와 또 가족들이 아버지와 남편인 광부들에게 보낸 편지들로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양재춘(74·여)씨는 30여년간 마을에서 강원슈퍼를 운영했다.

27살때부터 남편과 장사를 하며 아들 3형제를 키웠다.

하지만 남편이 몇해전 세상을 등지면서 슈퍼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장사를 놓고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또 일을 할수 없다는 마음에 5년간 수면제를 복용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건강이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구절리 보건진료소의 도움 때문이다.

마을에는 2006년 김수정(47·여)소장이 부임하면서부터 확연히 달라졌다.

속초에서 근무하는 남편과 좀더 가까운 근무지를 희망하다 정선에 자리가 나자, 경남 거창에서 듣도 보도 못한 구절리 마을로 근무지를 옮겼다.

평소 남다른 열정이 있던 그녀는 약을 복용하는 것보다는 운동을 해야 한다며 일일이 지역민에게 전화를 걸어 독려했고, 3년째 스포츠댄스와 건강체조 등 건강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군건강체조대회에서는 마을이 1등을 했다.

양씨가 수면제를 이용하지 않게 된 것도 바로 그녀의 역할이 컸다.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김소장에게 감사를 표한다.

# 석탄의 호황으로 지탱해던 마을이 흉물로 변해갔고, 그러던 마을에 다시 생기를 불러넣은 것이 바로 2005년 7월 기차가 끊어진 철길위로 레일바이크가 달리면서부터다.

이제는 한해 바이크 유료 관광객만 30만명에 달할 정도로 4년만에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하나둘 펜션이 문을 열기 시작하고, 폐광뒤 문을 닫았던 음식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음습했던 마을 분위기는 활기로 넘쳐났다.

과연 될수 있을까라는 반신반의속에 지자체와 당시 철도청은 첫 운행을 시작했고, 성과는 예상외의 강력한 것이었다.

석탄 운송의 기능이 적어져 철도청에서 폐선을 검토하자, 이를 관광자원화하는 지략이 번뜩였다.

북면에서 나고 자란 박종해(41)코레일투어서비스정선지사장은 레일바이크의 산증인이다.

그는 레일바이크가 문을 열기 전 공채로 들어와 최근에는 정선레일바이크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

박지사장은 “구절리를 비롯한 북면 주민들의 기대가 응집된 것이 바로 레일바이크다.

기존의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가듯,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개발로 바이크와 마을의 미래를 열어가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구절리 마을 사람들의 삶이란 그렇게 스스로의 역경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정진하는 모습과 다름 없었다.

그는 요즘 나이 마흔을 넘은 노총각의 꼬리표를 뗐다.

늦깎이 신혼생활에 푹 빠져있는 그의 표정에는 가정의 행복이 묻어났다.

구절리가 굽이굽이 아홉굽이 인생의 힘겨움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마을 주민들은 태어날때부터도 그렇고, 성장할 때도 그렇고, 그 역경을 이겨낼수 있는 의지를 갖춘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하여 오늘도 레일바이크는 철로를 지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정선=류재일기자 cool@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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