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역사속의 강원인물]신사임당은 현모양처?

작고 여린 것들에 큰 꿈을 묻은 신사임당 - 소설가 김별아

맞고도 틀리다

어진 어머니였고 착한 아내였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혈기방장하던 청춘의 한때, 나는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질했다. 고향 사오싱(紹興)을 배경으로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루쉰이 “(사오싱을) 신이 노하여 홍수로 쓸어가 버려도 좋다”며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은 바와 같이,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에 대한 사랑과 증오, 애착과 결별의 모순된 감정은 많은 작가의 공통된 업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살게 되면서, 나는 그토록 선망했던 익명의 대도시 속에서 문득문득 바다가 '고파' 외롭고 괴로웠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막상 고향에 오면 답답함과 왜소함에 진저리를 치며 또다시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변덕과 가탈이 연민과 회한으로 변하는 분수령이 바로 대관령 정상의 신사임당 시비(詩碑)였다.

늙어 백발이신 어머님을 고향에 홀로 두고

홀로 한양길 가는 외로운 이 마음

돌아보면 북촌마을 아득하고

해 저문 산에 흰 구름만이 날아 내리는구나.

생트집을 잡아 부모님께 신경질을 부린 일, 나 자신의 내력과 과거를 부정하고픈 요망한 마음이 축축한 안개구름과 함께 고스란히 후회와 자책으로 밀려와 결국 눈물 한 방울을 찔끔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휙휙 쌩쌩 스쳐 지나는 곳이지만 '아흔아홉 굽이' 구절양장으로 일컬어지던 옛 대관령을 걸어 넘으며 사임당도 나처럼 몇 번이고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을 것이다.

딸만 다섯인 집안의 둘째로 태어나 '아들 노릇(기실 '자식 노릇'이라 말해야 옳겠지만)'을 하며 늙은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건사했던 사임당은 1541년 서른여덟 살이 되던 해에 마침내 고향 강릉을 떠나 한성으로 삶터를 옮긴다. 강릉에 머무르는 동안 사임당은 파주 출신 이원수와 결혼했고,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렀으며, 셋째 아들 이(珥:율곡)를 포함한 여섯 아이를 낳았다. 결혼한 다음다음 해 한성에서 시어머니 홍씨에게 신혼례를 드린 후 10년 동안을 파주와 강릉과 봉평으로 옮겨 다니며 살기는 했지만 사임당의 마음은 언제나 고향인 강릉 북평촌에 머물러 있었다.

푸른 동해와 울울창창한 수풀과 드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고향은 사임당에게 깊은 지성과 너른 감성, 씩씩하고 굳은 기개를 북돋우는 원천이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외조부 이사온 공의 교훈과 비록 여자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재능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 부모의 가르침은 사임당을 여느 규방 처자들과 전혀 다른 여성으로 성장시켰다. 안견의 화풍을 본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고, 유교의 경전에 통하고 글씨와 문장에 능숙했으며, 바느질과 자수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어린 시절 꽈리 나무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려 친척에게 선물했는데 그 친척 어른이 그림을 펼쳐 두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닭이 와서 그림 속의 메뚜기를 쪼아 버렸다는 이야기나, 동네 혼인잔치에 놀러 갔다가 빌려 입고 온 치마에 단술을 쏟아 난처해하던 아가씨를 위해 치마폭에 포도덩굴을 그려 얼룩을 감춰주었다는 이야기 등은 사임당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과 인간적인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탄생 오백 년이 막 지난 2007년 11월, 신사임당은 한국 여성 인물 사상 최초로 5만원권 지폐의 초상 인물로 선정되었다. 한국은행은 신사임당을 화폐 인물로 선정한 이유를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자녀의 재능을 살린 교육적 성취를 통하여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등의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발표한 사임당의 업적 부분에서는 '양성평등의식', '여성의 사회참여' 등과 별반 연관성이 없는 효성, 내조, 영재교육 등 이른바 '현모양처'의 덕목이 강조되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실제로 여성계 일부에서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신사임당의 화폐 인물 선정을 반대한다”는 온라인 서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마침 강릉 출생으로 '치마폭에 꿈을 그린 신사임당(창비, 2004)'이라는 어린이 책을 펴내기도 했던지라 내게도 의견을 묻는 요청이 쇄도했다. '자식에게는 어진 어머니이고 남편에게는 착한 아내'라는 말뜻 그대로의 현모양처라면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라는 말은 맞고도 틀리다. 스스로 지어 부른 사임당이라는 호가 성군의 대표 격인 중국 주나라 문왕의 훌륭한 어머니 태임을 배우고 본받는다는 뜻인 만큼,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을 포함한 4남 3녀의 자식들에게 사임당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어머니였다. 실로 사임당이 우리 역사 속에서 '희귀'하다시피 한 여성 인물로 우뚝 자리 잡은 데는 율곡 이이가 쓴 '어머니의 일대기'(先行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율곡은 아버지 이원수의 행장은 쓴 적이 없지만, 어머니 사임당에 대해서는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행장뿐만이 아니라 모친상을 당한 직후 슬픔과 허무감에 빠져 금강산에 들어가 칩거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처럼 사임당이 '현모'였음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틀에 꼭 들어맞는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율곡의 행장에서 드러나는 사임당의 모습은 놀랍게도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던 여성상에 부합하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임당은 남자 집안 중심의 중국식 친영례가 자리 잡아 가던 조선 중기에 전통 혼례 방식으로 오랫동안 고향에 머무르며 친정 부모를 봉양했고, 좋게 표현하자면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남자'지만 실제로는 학문이나 재능이나 의지의 측면에서 사임당에게 턱없이 부족했던 남편 이원수에게 여필종부하기보다는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다”하였다. 아내의 투기는 칠거지악의 하나로 꼽히지만 사임당은 병약한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을 예감하며 남편에게 자식들을 위해 새장가를 가지 말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모친이 편찮을 때 몰래 외조부의 사당에 가서 기도했다는 율곡의 일화로 미루어볼 때 사임당의 자식들 또한 부계보다는 모계에 더 큰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실제 모습을 알면 알수록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라는 전통 여성상에 묶일 수 없는 독립적이고 진보적이며 강한 자의식을 가진 여성임에 분명하다.

사임당은 사임당이다. 대학자 율곡의 어머니이자 남편 이원수의 아내이기 이전에 이미 사임당은 사임당이라는 확고한 인물로 존재했다. 물론 사임당은 그녀가 살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엄연한 계급적, 사상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임당의 일대기는 그녀가 그저 의존적인 봉건시대 여성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사임당은 자식들에게 교사로서 삶의 올바른 길을 제시했다. 자기보다 부족했던 남편을 격려하며 정도를 걷도록 북돋웠다. 그러면서도 시대의 질곡과 한계에 맞서 자신의 예술적인 재능을 살려냈다. 나는 그녀가 그려낸 나비와 곤충, 꽃과 들풀들을 보면서 세상 밖을 향해 솟구치지는 못하지만 작은 것들로부터 우주를 찾는 고상한 영혼과 강건한 여성성, 그리고 자존심과 자신감을 읽는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강원도 강릉을 대표하는 이 두 여성 인물은 삶의 내력과 행보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자들이다. 또한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을 사랑했고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감당했으며 숨 막히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도 아름다운 재능의 꽃을 피웠다. 그들이 남긴 시와 그림 등은 권력과 부와 발언의 기회를 모두 가졌던 남성들에 비하면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강강한 의지와 예민한 감성은 작고 여린 것들 속에서 크고 깊게 빛난다. 나는 그녀들과 같은 고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처럼 한없이 기쁘고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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