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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월북작가 이태준, 그는 자신의 소설이 예술이기를 소망했다

[역사속의 강원인물, 그들이 꿈꾼 삶]소설가 오정희가 말하는 상허 이태준의 비극적 삶

1960년대 대학시절 나는 그를 이O준이라는 복자(伏字)로 만났다

그는 한국 단편문학의 완성자요

뛰어난 스타일리스트이며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갖춘 작가

심혈 기울였던 순수문예지 '문장'

일제에 의해 폐간되자

고향 철원 안협으로 돌아가

절필과 칩거생활로 저항,

해방 소식에 곧바로 상경해

남로당계 문학언론 운동 이끌어…

순수문학 기수로 불리던 그가

이념의 투사 변신은 당혹스럽다

1946년 홍명희와 함께 월북

북한 문학계 요직 두루 거치지만

종전 이후 혹독한 비판 받아

'부도덕과 에로티시즘의 전파'

'미국의 앞잡이' 죄명으로 숙청돼

신문사 교정원으로 추방당해

"나는 김일성 소설 못 쓴다

내게 죄가 있다면

당의 명령을 거역한 것뿐

작가의 양심을 뭉개고

개인 숭배에 앞장서는

변절작가는 될 수 없다"

그는 이념의 길을 따라 그렇게 갔다

1960년대 후반 대학 시절 한국문학개론 수업 시간에 나는 그를 이O준이라는 복자(伏字)로 만났다. 이O준, 정O용 등등… 젊은 강사선생은, 그들이 제외된 우리 문학사는 반쪽짜리 문학사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운문에는 지용, 산문에는 상허(이태준)'라고 불릴 만큼 당대의 대표적 문학가인 정지용과 이태준의 책이 금서로 묶여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이또한 분단의 크나큰 비극이고 손실이라고 말했었다. 실체를 접할 수 없을 때 환상과 아우라는 더욱 강렬해진다. 그의 작품들이 불온한 지하문서처럼 극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은밀히 읽힌다는 풍문과 더불어 그는 한국 단편문학의 완성자요 뛰어난 스타일리스트이며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정교한 구성력을 갖춘 작가로 전해졌다.

1988년 7월, 월북. 납북 작가들에 대한 해금 조치로 '이O준'은 비로소 온전한 이름을 찾고 문학세계의 족쇄가 풀리게 되었다. 뒤늦게 그의 작품과 행적을 읽으며 나는 서술이 아닌 묘사를 해야 한다는 것, 인물의 성격 창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거나 문장미에 대한 집요한 노력 등, 내가 받은 문학교육이나 문학관이 적지아니 그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함께 그토록 출중한 일세의 문장가요,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심미안을 지녔으며 자신의 소설이 예술이기를 원했던 작가의, 해방 이후 변모와 변화가 의문스러웠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적 시대적 존재로서 세상과 관계 맺으며 한 생애라는 피륙을 직조해간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많으나 그들 모두가 작가, 시인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한 원로시인은, 고통과 시련이 바로 문학을 낳고 키우는 상명당(上明堂)이라 하였다. 망해가는 왕조의 백성으로 태어났으며 너무 어린 나이에 겪은 부모의 죽음, 낯선 이국과 타향을 떠돌았던 유년기,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 뛰어난 문재와 예민한 자의식, 식민지의 지식인 등등 이러한 시대적 개인적 조건들이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격변기의 간난했던 성장기와 작가로서 겪은 해방과 월북, 그 후의 숙청과 이어지는 전락의 비극적 삶에 대해 비평가 정현기는, 그것이 이태준 개인사적 운명을 넘어 우리 민족사의 운명을 축약한 구도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종의 교양소설이자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는 '사상의 월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단편에서 그의 모습이 음화로, 양화로 드러나있어 자전적 면모가 강하다. 때문에 우리 민족이 겪는 시대고를 외면한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말대로 '작품은 개인의 뿌리에서 피어나는 꽃이거늘!' 자신의 문학의 근원적 근원인 삶과 상처를 외면한 글이란 공소해지기 십상일 것이다. 멸망한 왕조의 잔영에 서식하며 헛된 기대와 향수로 스러져가는 늙은 유학자, 현실과 이상의 낙차에 좌절하는 지식인, 사회의 그늘에 가려져 소외당한 인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파하는 이태준은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분노와 슬픔과 좌절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삶의 구체성 속에서, 피폐하고 추락하는 인물의 심리와 성격창조를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대의 그 어떤 작가보다 프로페셔널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김유정과 이상에 대한 추모글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에서 자신의 문학관을 확고히 천명한다. '무릇 소수의 그 독자, 당신자신의 기질에 맞는 최선의 형식으로 무엇이든지 아름다운 것을 지어달라는 그 독자를 위해 붓을 들 것이다. 그 외의 독자는 천이든 만이든 우리에겐 우상일 뿐이다'라고.

대중을 선동하거나 그들과 야합, 아부하지 않는 문학 고유의 예술성을 강조했던 그는 이듬해 단편 '패강냉'을 이상견빙지 履霜堅氷至(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라)라는 주역의 한구절로 끝맺으며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더욱 가혹하고 악랄해지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작가 이태준의 비극적 전망과 암울함이 깊어지며 그때까지 자신의 삶과 문학을 돌아봄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고뇌와 모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참다운 예술가 노릇 이제부터 시작할 결심이다. 나는 아직 작가생활이 아니었다. 실제적으로 습작을 해왔다'고 고백하며 '나도 더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일 년에 단편 하나를 내더라도 정말 예술가 노릇을 시작해야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이런 결심은 그에게 결핍된 것으로 비판받던 '사상성과 현실탐구, 현실인식'에 대한 각성이기도 할 것이다. 이어 발표한 '영월영감'과 '농군'은 그러한 성찰과 반성의 성과물이다.

작가란 자신의 일에 대해 실존적 사회적 물음을 그칠 수 없는 존재이다. 작가에게 현실은 언제나 질곡이며 그가 살고 있는 시대란 맞섬과 불화의 대상이기 마련이다. 조지오웰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태준은 문학의 예술성과 정치성 가운데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할 것인가, 이념적 실천과 문학활동을 어떻게 조화롭게 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무리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문학이라 할지라도 문학의 예술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시종 지니고 있었으나 탄압과 억압의 엄혹한 시대상황이 지식인 예술가들에게 부과하는 막중한 부채의식과 지사적 소명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터였다.

심혈을 기울여 이끌었던 '문장'지가 일제에 의해 폐간되고 실의와 분노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1943년 마침내 고향인 강원도 철원의 안협으로 돌아가 절필과 칩거생활을 하게 된다. 산다는 것이 쓴다는 것과 동의어일 작가에게 낙향과 절필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의 방식이었다.

해방소식에 곧바로 상경한 그는 왕년의 카프 문인들과 함께 발빠른 행보로 좌익계의 핵심에 들어가 남로당계 문학언론 운동을 이끌어가게 된다. 순수문학의 기수로 불리던 그가 이념의 투사로 급격히 변신하는 과정은 당혹스럽다. 1946년 그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럽고 정치성이 강했던 해방공간을 그린 소설 '해방전후'를 발표한다.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극복하고 새로운 현실에서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 믿고 역사발전에 동참하겠노라는 주인공의 결심은 바로 작가자신의 그것일 터였다.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작품은 작가 이태준이 고향에서 은거하며 광복이 되기까지 겪은 고통과 불안 심리적 변화와 문학적 지향점에 대한 사유 등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태준은 1946년 7월 말경 홍명희와 함께 월북한다. 그의 월북 동기에 대해서는, 지난날의 판단착오에 대한 참회와 속죄라거나 권력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야심 때문이라거나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하기 위해서라거나 등등 보는 이의 관점과 입장에 따라 추측이 분명하다. 북한에서 '조선의 모파상' 이라 불리며 극진한 대접을 받은 그는 8월 10일부터 10월17일까지 2개월여의 소련방문 후 '소련기행'을 발표한다. '참으로 황홀한 수개월이었다. 인간의 낡고 악한 모든 것은 사라졌고 새 사람들의 새 생활, 새 관습, 새 문화의 새 세계였다'로 시작하는 이 기행문은 시종 흥분과 감동, 소련에 대한 전폭적인 경의와 찬양으로 끝을 맺는다.

북한 문학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전쟁 때는 낙동강까지 종군했던 그는 종전후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이태준의 모든 작품이, 문학의 공리성을 주장하던 카프문학에 맞서 순수문학을 표방했던 과거 구인회활동과 함께 심판대에 올랐다. 문학적으로는 '부도덕과 에로티시즘의 전파' '절망과 무기력과 영탄의 선전' '고독과 애수의 전파'로 인민들에게 무희망을 불어넣었으며 자기해방투쟁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주입하는 독소라는 죄명으로,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앞잡이'라는 죄명으로 숙청당한 뒤 1956년 함흥노동자신문 교정원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함흥 콘크리트블록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었다. 1964년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하였으나 종내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 이태준이 사상투쟁 무대에 오른 것은 그가 정치성 없는 글, 즉 김일성 우상화의 글을 안 쓴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이태준은 가족들에게 비참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나는 김일성소설을 정말 못쓴다. … 내게 죄가 있다면, 제철공장 노동자들이 김일성 수상의 빨치산 혁명정신을 받들어 불철주야 공장을 가동해 생산을 배가하고 있다는 내용의 소설을 만들어 인민들로 하여금 김일성 수상의 사상과 당의 영도, 마르크스 레닌 정신에 깊이 감동받게 하라는' 당의 명령을 거역한 것뿐이다. 나는 작가의 양심을 뭉개고 개인숭배에 앞장서는 변절작가가 될 수 없다.'

이태준은 이념의 길을 따라 그렇게 갔다. 그것은 이념의 힘으로 열릴 새로운 세상, 평등하고 행복한 삶에의 희망과 열망, 순진한 믿음을 가진 많은 사람이 간 길이었다.

'이태준의 소설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우울과 애수, 그리고 깊은 정감의 세계가 그의 소설 깊이 흐르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어휘와 표현, 그리고 잘 다듬어진 이미지와 구성적 장치, 개성적 인물의 형상화와 서사적 완결성으로 하여 그의 단편은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그만의 독보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의 성과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소설이 예술이기를 자각적으로 소망했던 그의 예술에 대한 독특한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지사적 실천의 의지와 예술자율성의 욕망, 민족에 대한 윤리적 의무와 개인주의적 예술에 대한 희구, 근대적 이성에 대한 인정과 감성적 느낌에 기반한 예술에 대한 동경 등 서로 맞선 가치들이 이태준이 지향하는 예술의 내부를 간단치 않게 교차하면서 가로지르고 있다.

(송인화-이태준 소설의 예술성 중에서)

*소설가 오정희 프로필

■1947년 11월 9일 서울 출생.

■1970년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졸업.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 인'이 당선돼 등단.

■1979년 '저녁의 게임'으로 이상문학상을, 1982년 '동경(銅鏡)'으로 동인문학상을, 1996년 '구부러진 길 저쪽'으로 오영수문 학상을, 같은해 '불꽃놀이'로 동서문학상 을, 2008년 현대불교문학상 등 주요 문학 상을 수상.

■2003년 '새'로 독일의 주요 문학상인 제16 회 리베라투르상을 수상. 해외에서 한국 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사에 매우 뜻깊은 사건 으로 평가.

■2007년 1월부터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으로 활동.

■주요 저서:창작집'불의강' '중국인 거리' '유년의뜰' '바람의넋' '불꽃놀이' 등 다수, 수필집 '내마음의 무늬', 콩트집 '돼지꿈' '가을여자', 동화집 '송이야 문을 열면 아 침이란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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