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역사속의 강원인물]묘역 뒤편 우뚝 솟은 잣나무…윤희순 義士의 기상처럼 푸르렀다

소설가 김도연씨와 떠나는 '윤희순 의사의 흔적 찾기'

공지천이 내려다보이는 춘천시립도서관 뒤뜰

1990년 한국여성예림회에서 세운 윤희순 동상

주변을 탑돌이 하듯 돌다 나는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1990년대 말 이 도서관을 얼마간 드나들었다는 사실

소설을 써 이름을 얻겠다고 아등바등하였다는 사실

윤 의사의 동상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는 사실

한 마디로 부끄럽고 창피했다

춘천 남산면 가정 2리, 지청마을에 자리한 묘역

홍천강 내려다보이는 관천리에 있던 것 4월 옮겨와

윤희순 의사의 부부 묘가 가운데에 합장돼 있고

왼편에 시아버지 유홍석 부부의 합장 묘소

오른편에 아들 유돈상 부부의 합장 묘까지

말할 것도 없이 가족 의병단의 묘역이었다

윤희순 의사가 시집와 살던 춘천시 남면 발산리 항골

집터 오른쪽에는 '해주윤씨의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왼쪽에는 을미의병 때 출정한 시아버지 유홍석의

무사귀환을 빌며 정안수로 쓰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무성한 칡넝쿨이 뒤덮인 채였다

허물어져가는 석축만이 서늘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공지천이 내려다보이는 춘천시립도서관 뒤뜰, 윤희순(尹熙順) 의사(義士)는 치마저고리에 짚신을 신고서 '안사람 의병가'와 '병정가'를 외로이 노래하고 있었다. 소나기 지나간 뒤의 하늘은 푸르렀다. 숲속의 새들이 화답하듯 한바탕 울고 사라졌다. 도서관의 나무 그늘에는 공부를 하다 나온 젊은이들이 전화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독해 보였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 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 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내 집 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 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 것이니 의복 버선 손질하여 만져주세.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고 아늑하게 만져주세. 우리 조선 아낙네들 나라 없이 어이 살고, 힘을 모아 도와주세. 만세만세 만만세요 우리 의병 만세로다.

1990년 11월7일 한국여성예림회 강원도지부에서 세운 윤희순 동상 주변을 탑돌이 하듯 돌다가 나는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1990년대 말 나도 이 도서관을 얼마간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소설이란 걸 써서 이름을 얻겠다고 아등바등하였다는 사실을. 도서관 뒤편의 윤희순 동상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는 사실을. 나와는 거리가 아주 먼 일, 먼 사람으로 치부해버렸다는 사실을. 한 마디로 부끄럽고 창피했다.

윤희순 의사의 손자인 광복회 강원도지부장 류연익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 그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더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삼 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삼 대를 걸쳐 한반도와 만주를 떠돌며 살았다는 얘기였다. 처음에 나는 류연익 선생이 윤 의사의 손자란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만주에서 태어난 류 선생은 12살 때 광복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50여년이 지나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 중국을 15여회 드나들었다고 한다. 아버지 유돈상의 친구가 일러준 옥수수밭에서 봉분도 없는 할머니의 관을 찾았을 때의 감격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하루 종일 포클레인으로 발굴을 하다가 새벽에 관을 찾았는데 널이 그대로 있더라고. 할머니 역시 그대로 있더라고. 두 손으로 할머니 얼굴을 만지려하자 그제야 내려앉으며 가루로 변하더라고. 류연익 선생은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독립운동을 하다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할머니를 1994년 국내로 모셔왔던 것이다. 1923년 정월 열닷새 날 윤희순 의사는 고단했던 당시의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애닯도다 애닯도다 우리 의병 불쌍하다 이역만리 찬바람에 발짝마다 얼음이요 발끝마다 백서리요 눈썹마다 얼음이라 수염마다 고드름에 눈동자는 불빛이라 부모처자 떨쳐놓고 나라찾자 하는의병 불쌍하고 불쌍하다 물을잃은 기러기가 물을보고 찾아가니 맑은물이 흙탕이요 까마귀가 앉았구나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이내몸도 곱던얼굴 주름살이 되었어라 어이할꼬 애닯도다 후년이나 고향성묘 절해볼까 하는것이 주름살이 되어가니 불쌍할사 이내신세

그러나 윤 의사는 결국 고향 성묘를 못 가고 손자의 품에 유해로 안겨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묘역과 시집와서 살던 집터가 있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의병마을로 차를 달렸다. 가평 춘천 전투를 끝낸 의병들이 걸어서 넘었던 충의고개는 터널이 개통돼 있었다. 의병마을로 가는 동안 류연익 선생은 어린 날 고국으로 돌아와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살았던 신산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게 또 있었다. 모든 재산과 시간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후손들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정부조차 한때 그들에 대해 무관심했었다. 오히려 일제의 앞잡이들과 그 후손들이 축적한 재산으로 떵떵거리고 산 게 이 땅의 슬픈 현실이었다. 윤희순 의사는 그 앞잡이들을 향해 이렇게 포문을 열었다.

너의 자식이 있다면 무슨 낯으로 얼굴을 대하며 무슨 낯으로 이 나라에서 산단 말이냐. 내가 조선 사람인데 일본 놈이 될 수 있느냐. 하루빨리 마음을 고쳐서 충신 되고 애국자가 되도록 하여라. 후대에 너희 자식 손자까지 대대로 무슨 낯으로 이 땅에서 산단 말이냐. 후대에 너희 자손이 원망하지 않도록 하여라. 다시 마음을 고쳐서 훌륭한 조상이 되도록 하여라. 후회하지 말고 꼭 마음을 고치도록 하여 주길 바란다.

앞잡이들은 윤 의사의 이 일갈을 들었을까. 듣고도 모른 척했을까. 아니면 밀고를 했을까.

윤희순 의사가 시집와 살던 춘천시 남면 발산리 항골 집터에는 친척 분이 살고 있었다. 집터 오른쪽에는 1982년 강원대학교가 주관한 '해주윤씨의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당시 양편에 심었던 향나무는 깊고 그윽한 향을 풍기는 것만 같았다. 집터 왼쪽에는 을미의병 때 출정한 시아버지 유홍석의 무사귀환을 빌며 정안수로 쓰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무성한 칡넝쿨이 뒤덮인 채였다. 허물어져 가는 석축만이 서늘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집터를 나오는데 무언가 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돌아보니 야산의 잣나무 몇 그루 싱싱한 잣을 매단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의병의 자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던 자리에 세운 '충의성지발원비'와 그 옆 이 땅의 대표적인 의병장들을 모신 사당인 '주일당(主一堂)'을 둘러보고 묘역으로 향했다.

가정리 일대는 그야말로 의병들의 무대였다. 눈에 보이는 거의 대부분의 묘가 의병활동을 한 사람들과 연관이 있었다. 류연익 선생이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묘들을 눈길으로나마 좇아가는 것도 벅찼다. 가정 2리, 지청마을에 자리한 묘역은 홍천강이 내려다보이는 관천리에 있던 것을 올해 4월에 이장했다고 한다. 윤희순 의사의 부부 묘가 가운데에 합장돼 있고 왼편에 시아버지 유홍석 부부의 합장 묘, 오른편에 아들 유돈상 부부의 합장 묘, 그리고 가장 오른편에 류연익 선생의 생모인 '음채봉 여사 애모비'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가족 의병단의 묘역이었다.

숙연했다. 묘역 뒤편 채벌을 한 산에도 잣나무들이 드문드문 우뚝 서 있었다. 기상이 푸르렀다.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시아버지를 잃고 남편을 잃고 자식까지 차례로 잃은 윤 의사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 것만 같았다. 윤 의사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자식을 잃은 슬픔의 일면을 토로했다.

칠월 열여드레 날 데려가라는 소리를 듣고(아들 유돈상) 가보니 요동감옥에서 나오는데 매를 얼마나 때렸는지 다 죽은 사람을 데리고 무순에 있는 제 처갓집이 가까워서 가는 도중 숨이 지니 어찌할 수 없어 옆 야산에다 묻어놓고 유(柳) 자(字)만 한 자 새겨 놓았으니 이 슬픈 마음을 이루 다 말하리오. 차라리 내가 죽고 말면 오죽 좋겠습니까. 우리는 만리 타국에서 누구를 의지하며 살며 연직이와 봉준이 이 어린 것을 누구에게 맡기오리까.

묘역을 떠나오면서도 나는 계속 묘소 뒤편의 잣나무만 바라보았다. 여의내골(여우골) 의병훈련장으로 가다가 나는 류 선생에게 다시 우문을 던지고 말았다. 만주에서 가족들이 왜 계속 옮겨 다니며 살았느냐고.

“한 곳에 있으면 잡혀 죽으니까!”

윤희순 의사는 직접 쓴 '해평윤씨일생록'에서 '윤씨 할미가 자손들에게 보내는 말'이라며 이런 당부를 남겼다.

할미는 공부가 없어서 잘 쓰질 못한다… 금전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는 못 쓰느니라… 조상의 필적이 난관(難關) 중에 손실이 많이 되었으니 다시 찾아 비치하도록 하여라… 사람이 해야 할 일 외에는 알지 마라… 누가 무엇을 물어보거든 어림짐작으로 대답하지 마라… 앞사람이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말이 끝날 때에 하느니라… 매사는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딱딱한 잣송이가 내 정수리를 때리는 뜨거운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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