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역사속의 강원인물]“민족의 운명을 왜 남에게 맡기나” 끝까지 통일정부 위해 싸웠다

우사 김규식은 진정한 민족주의자이며 이성의 큰 정치가-전상국 작가·강원대 명예교수

홍천 화촌면 구성포가 고향

불의의 고아로 미국 선교사 집에 입양

신식 근대교육 받으며 '독립신문' 기자로

“나라 개화 위해선 서구 문물 배워야”

서재필 권유로 美 로어노크대학 유학

나라 사랑의 참 정신 심어진 계기

이 무렵 일본이 식민통치 강화

도쿄대학 입학·장학금 제의도 거절

청년 교육과 민중 계몽운동에 전력

中 상해서 독립운동 기반 조성에 주력

임시정부 수립의 결정적 계기 된

'파리강화회의' 한국 민족대표로 활동

임시정부 내분으로 한동안 정치 접다가

부주석으로 김구와 함께 광복 이루어내

단독정부 막기 위해 혼신의 힘

평양서 김일성과 회담 불구 뜻 못 이뤄

남한만의 총선거 '불반대·불참가'

성명 발표를 마지막으로

건국기초작업에 대한 정치활동 끝내

납북된 해 70세로 서거 그곳에 안장

■ 홍천 사람 김규식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가요, 광복 직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자주적 통일국가 수립운동에 앞장섰던 큰 정치가인 우사(尤史) 김규식(奎植)의 고향이다.

김규식은 청풍(淸風) 김씨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1881년 아버지 김지성(智性)이 부산 동래에서 잠시 관리로 있을 때 그곳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네 살 때 아버지가 일제의 불평등 무역을 보고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가게 되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불의에 고아가 된다.

이 무렵 어린 소년 김규식의 일생을 결정짓는 첫 번째 사람과의 만남이 이뤄진다. 중병에 걸려 죽어가던 그가 미국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 집에 입양되어 고아학교인 민로아학당과 구세학당에서 서양식 근대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소년 김규식은 아버지를 찾는다고 학당을 이탈하여 고향 홍천 구성포 마을에 돌아와 머무는 등 자신의 불우한 운명과의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아무튼 소년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의 엄격한 규율 아래 한문뿐 아니라 성경과 영어까지 배우는 신식 공부를 하게 된다.

1896년 뛰어난 성적으로 언더우드 학당을 졸업한 소년 김규식은 당시 국문과 영문으로 발간되던 '독립신문'의 취재기자가 되면서 '나라를 개화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문물을 배워오는 것'이라는 서재필의 권유에 의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서재필과의 만남이 소년 김규식에게 나라 사랑의 참 정신이 심어진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미국 로어노크대학 유학

16세 소년 김규식은 1897년 가을,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어노크(Roanoke College)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로어노크대학 재학 중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과 만나 교우관계를 가진다. 소년 김규식은 유학 1년 만에 준우등의 성적으로 예과를 졸업하는 등 발군의 성적을 보인 뒤 본과에 입학해서도 전 과목 평균 90점 이상을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영어는 물론 라틴어, 불어, 독일어 등 외국어 실력은 단연 빼어났으며 1901년 1월에 시행된 연설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는가 하면 1903년 대학잡지에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통해 한국정부의 무능한 정치가들을 비판한 뒤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나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글을 기고해 훗날의 국제정세를 예고하기도 했다.

1903년 6월 로어노크대학을 전체 3등으로 졸업한 청년 김규식은 졸업생 대표로 선발되어 기념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학사가 된 것이다. 청년 김규식은 1903년 가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1904년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고국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칠 결심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 고국에서의 교육 및 사회활동

이 무렵 나라의 운명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뒤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민족운동자들에 대한 탄압을 벌이는 등 극심한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그런 혼란한 상태 속에서 김규식은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도와 선교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경신학교, YMCA 학관, 배재학당 숭실학교 등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등 청년 교육과 민중 계몽운동에 전력한다.

이때 김규식에게 조선총독부가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 특별 입학과 장학금 제의를 해왔으나 모두 거절했다. 이는 일제가 민족운동자들을 탄압해 국내의 독립운동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에 말려들지 않기 위한 김규식 나름의 항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상해 망명 시절

나라가 일제에 강압 합병이 되면서 국내의 많은 애국지사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해외로 망명을 하기 시작한다. 김규식도 밖에 나가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호주 유학을 핑계로 망명길에 올라 1913년 4월 중순 상해에 도착한다.

상해에서 김규식은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이 1912년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동제사는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하였고, 김규식은 이 학원의 영어교수직을 맡았다. 이때 김규식은 김성(成)이라는 가명으로 1917년 7월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 파리강화회의 민족대표로 파견

이 시기의 국제정세는 크게 바뀌고 있었다.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정의와 평화를 내세우는 인도주의와 민족주의의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1917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노농정권이 들어서면서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을 선언하자,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의 민족들은 큰 힘을 받게 된다.

특히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드러내 밝히면서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은 이를 기회로 독립운동을 구체화한다. 여운형, 서병호, 김철, 조소앙 등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이때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한국 민족대표로 파견한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파리로 떠나기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이후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는 등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나라의 독립을 위한 정치 외교가로서 크게 활동한다.

■ 상해임시정부

1919년 4월13일 수립된 상해임시정부는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을 임명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난립과 내분으로 김규식은 한 동안 정치활동을 접고 상해 복단대학과 동방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한인 학생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중등과정의 고등보습학원을 세워 운영하다가 1927년에는 톈진으로 옮겨 북양대학 교수로 활동한다.

그러나 청년 교육의 선구 김규식은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정세가 변하자 김규식은 다시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즈음 일제는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과 1932년 1월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 민중의 항일 열기가 높아짐에 따라 우리 민족도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1940년 4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두 번에 걸쳐 한국독립당의 김구가 임시정부의 주석을, 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이 부주석 자리를 맡아 나라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결국 이들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와 협력을 하며 조국 광복을 이루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 광복 후 1950년 납북

1945년 8·15 광복 이후, 김규식은 임정 요인들과 함께 11월 1차로 귀국한다.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으로 신국가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힘썼다. 특히 남북 양쪽에서 단독정부의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이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1948년 2월 국제연합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안이 통과되자, 분단을 막고 민족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남북한 모든 정치세력 간의 협상을 주장하며 김구와 함께 북한 당국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했다. 북한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4월에 남북연석회의와 요인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하자, 4월21일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김두봉 등과 요인회담을 가졌다.

김규식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왔고, 남한만의 5·10총선거에 '불반대·불참가'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활동은 마침표를 찍는다.

1950년 9월, 김규식은 납북되어 같은 해 12월10일, 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70세를 일기로 서거. 북한의 평양 인근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1991년 광복회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선열제단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 이성의 참 정치가 김규식, 그를 다시 기리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규식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북한도 1990년 김규식 선생에게 조국통일상을 추서했다.

2013년 6월21일,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위원회는 김규식 임시정부 부주석 등 274명 납북자를 공식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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