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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신년특집 신춘문예 당선작]택배를 기다리는 동안

단편소설 조수연

L은 서서히 그들을 떠나가고 있었다.

그가 막, 들어선 곳이 입구인지, 출구인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는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택배가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오늘 택배가 잘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루만 더 버티면 아내가 보낸 택배를 받을 수 있다.

L은 할 수 있는 한 견디려 했다.

L은 굳은 표정으로 동트는 새벽을 바라보았다. 새벽은 차고 축축했으며 적막했다. 나눌 체온 없이 서늘한 상체를 문 밖으로 내밀었으나 공기의 질감은 눅눅했다. 아주 잠깐 서있었는데도 쌀자루를 짊어진 것처럼 어깨가 무거워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L은 어머니의 흔적이 배어 있는 거실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옷차림과 치운 적 없는 이부자리를 보면서 밤과 낮의 경계를 허물은 고독한 자신이 흉해 보여 몸서리를 쳤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견딜만했다. 상처를 견딜 만 하다는 것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L은 마늘과 고춧가루, 참기름과 감자를 박스에 넣고 단단하게 포장했다. 쉽게 지쳐 자주 잠이 들어서인지 밤잠이 길지 않았다. 오랜 시간 혼자 밥을 먹어온 탓에 식욕이 떨어졌는데도 새벽부터 일어나 이것저것 물건을 챙겨 포장하다보니 배가 고팠다. 그가 아침 일곱 시를 확인하고서 마트를 가기 위해 현관문을 여는 순간, 몸은 와해되고 기억은 흐릿해서 마치 허공에 부유한 듯했다. 매일 보아온 익숙했던 사물들이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밑창이 닳은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느릿느릿 밖으로 나갔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길이 아닌 것 같았고, 때때로 길이 없는 듯 했으며, 끝내는 길을 잃어버려 누군가의 손에 끌려가듯이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어느 곳에 있어도 단조로운 일상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인적은 드물고 모래바람만 인다. 걷다가 퉁퉁 부은 발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인데도 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래 찜통이니, 오늘도 여럿 데어 죽겠구먼.”

파리를 ㅤㅉㅗㅈ던 마트 주인이 아는 체를 했다.

“고향이 어디십니까?”

L은 마트 주인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그는 호남 출신이지만 이곳에 산지 이십년이 넘어서 고향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마트 주인은 L에게 몸이 많이 불편하냐고 물었다. L은 그렇다고 대답은 했지만,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하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트 주인은 L을 위로하려다 말고 “우리 집사람은 유방암 말기요.” 그는 당연한 일을 말하듯 표정이 담담했다. 그의 아내는 외관상 건강해 보였으며 영화배우 이미숙을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의 말이 울림처럼 '웅웅' 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L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아주머니는 어디 물놀이라도 가셨습니까? 요사이 며칠 보이지 않던데.”

마트 주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L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L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살아있는 것이 마냥 죄스럽기만 했다. 부모의 가장 큰 자랑거리던 그가 건강악화로 고향에 돌아 왔을 때는 수치와 걱정거리가 되었다. 칠순이 넘은 노모는 L의 병원비를 대느라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지난 오년동안 오피스텔에서 동생 집으로, 동생 집에서 그의 집으로, 그의 집에서 고향집으로 옮겨졌다. L의 아내는 아이 셋을 부양하며 빚을 갚느라 밤낮없이, 쉬는 날 없이 일했다.

L은 하려던 말을 끝내 찾지 못해서 소보로빵과 우유를 사들고 나왔다. 주인은 말없이 돌아서는 L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L은 습관처럼 정육점을 하는 친구에게 들렀다. 친구도 L에게 몸이 더 불편해졌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L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L은 도로 확장으로 인한 보상금이 언제쯤 나올 것인지를 물어보았지만, 그는 친구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만 원도 안 되는 돈 받아서 니 병원비로 다 썼다고 니가 말 안했나?”

L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고 화를 냈다. 잠시 후, L은 자신이 왜 화를 냈는지 친구에게 물었다.

“밥은 묵었나? 거 손에 뭐나? 빵 이가? 어무이가 니는 빵 묵으면 죽는다 카던데?”

L은 또 다시 머리가 '띵' 했다. 소리는 뭉개진 것처럼 선명하지가 않았다. 뱃속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한줄기 땀이 푸석해진 얼굴 위로 흘러 내렸다.

“내 나이 쉰이다.”

그는 신트림을 내뱉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았다.”

친구는 리모컨을 들어 켠 줄 몰랐던 TV를 끄면서 말했다.

“사는 것처럼 살아야 사는 것이지.”

엉성하게 맞물린 대화는 하다만 고백처럼 의미를 잃었다.

“니 수술은 받았나? 한 달 전부터 수술 한다 안했나?”

불현듯 L은 몸속에서 부풀고 있을 암세포가 떠올랐다. L은 하려는 말이 생각났지만 배를 쓸며 겁에 질린 것처럼 몸을 떨면서 일어섰다. 뜨거운 태양빛이 그의 숱 없는 암회색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친구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기가 여간 꺼림칙한 게 아니었다. L은 택배기사를 부르기 위해 걸음을 빨리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어머니가 전화로 “방금 전 흰죽을 끓여 놓고 왔다. 좀, 챙겨 묵우라.”고 말했다. 작은 어머니는 물기 없는 싱크대와 텅 비어 있던 냉장고를 떠올리며 울먹였다. L이 흰죽을 떠서 입에 넣으려는데 배가 부글부글 끓었다. 화장실로 달려가서 바지를 벗자마자 봇물 터지듯 혈변이 쏟아져 나왔다. 답답한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지만 부풀어 오른 배는 가라앉지 않았다. 고요 속에 파묻힌 한 낮의 적막 속에서 변기통에 앉은 L은 치밀어 오르는 통증으로 온 몸을 뒤틀며 몸부림쳤다.

문을 열어 놓아도 들어오는 바람한 점 없다. 택배기사가 다녀가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땀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흐릿한 안개에 잠기듯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 낮인데도 커튼을 쳤더니 거실은 암흑 그 자체였다.

L은 밥을 먹는 것도, 혼자 먹기 위해 밥을 하는 것도 귀찮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두 달 전에 종합검진을 받았다. 건강에 별 이상이 없다고 해서 L은 안심했다. 가끔씩 어지럽다고 했지만 토하지도 않고 안색도 괜찮았다. 먹는 것도 소화시키는 것도 L보다 우월했다. 특별한 증상을 보이지 않아서 병원에 미리 가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서서히 인지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말투도 어눌해졌다. 보름 전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도무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해도 어찌된 일인지 L은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려 하지 않았다. L이 몇 번의 시술과 뇌혈전증으로 인해 판단력이 둔화된 탓이기도 했다. L은 뒤늦게 어머니를 입원시키고 나서 매일매일 눈물을 흘렸다. 사실, 어머니보다도 그의 병이 더 위중했다. 특별히 믿는 신은 없었지만, 제발 어머니가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의사는 L에게 말기 간암환자라서 혼자 있지 말라고 당부했다. 당뇨 합병증으로 기능을 상실한 간과 콩팥 옆에는 다섯 개의 종양이 생겨났다. 마침 금요일에 진료를 예약해 두었으니, 택배를 받아 두고 나서 병원에 가야겠다며 자신에게 괜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두 개를 제거한 후에 주치의는 병원을 옮겨보자고 했다. 어머니가 최근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L은 어머니의 경과를 지켜 보고나서 서울병원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개의 종양은 부풀대로 부풀고 있었다.

복통은 더해졌다. 발과 종아리가 퉁퉁 붓고 가스가 찼는지 복부가 팽팽하게 부어올랐다.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랬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살아가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인생은 혼자 죽어가는 거야.

L은 세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운동화를 사준 적이 언제인지 떠올려 보았다. 다음번에 만나면 운동화를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기저귀 갈아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 자라서 아빠보다 발도, 키도 커졌어.' 하고 중얼거렸다.

L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았던 지난 오년동안 한 달에 한 번씩 택배를 보냈다. 매년 여름에는 세 아들의 신발을 사서 보냈고, 백화점 세일기간에 옷을 사두었다가 함께 포장했으며, 서점에 들러 베스트셀러와 참고서를 사서 보내기도 했다. 소설은 주로 블루픽션 시리즈였으며, 영화로 제작된 요리만화와 챔프코믹스에서 출판한 일본만화도 있었다. 물론 살아남기 시리즈물이나 역사와 신화를 다룬 학습만화와 판타지 소설도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건강보조식품을 보냈다. 세 아들의 발은 일 년에 십 밀리미터씩 자랐다. 작년부터는 막내의 키가 L을 훌쩍 넘어섰다. L은 택배가 도착할 때까지 늘 긴장했다. 잘 받았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안심했다. 물건을 준비하고 포장한 뒤에 택배를 보내고 나서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은 그가 실패자가 아닌, 세 아들의 아버지와 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살아있는 가치를 느끼게 했다. 그가 첫 택배를 보내고 나서 막내아들 준의 전화를 받았을 때, 걷잡을 수 없는 희열이 솟아났다. “아빠, 택배를 기다릴 때는, 아빠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대가 되고, 택배가 도착하면 아빠한테 선물을 받는 기분이야.” 그는 아주 잠시, 그게 그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행복의 기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첫아들 현과는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L은 현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첫째가 스무 살이 되면 오토바이를 타고 함께 여행을 할 거야.”라고 딸만 둘을 두었던 친구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현은 첫아들답게 듬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주기적으로 표창장을 받았고, 반장을 했다. L의 세 아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는 성별에 집착하거나 둘째나 셋째가 아들인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며 뿌듯해했다. 아이들이 어려서 손이 많이 가는 시기에도 휴일에는 함께 마트를 가거나 자주 외출했다. 둘째 견은 살가움으로 자칫 무관심할 뻔했던 존재감을 스스로 찾는 아이였다. 견은 자라면서 사막에 버려져도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L은 “그 녀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 같아.”라는 말을 자주했다. 셋째 준은 걸음마를 하기 전부터 계곡캠프에 잘 적응했다. 타고난 체질이었을까. 구명조끼를 입혀놓으면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물에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은 수영선수가 되었다가 올해 그만 두었다.

금세 하루가 저물었다. L의 하루는 망각의 심연 속으로 사라지거나 침몰 한 배처럼 한 없이 심해로 가라앉았다. L은 해거름 무렵에 누운 채로 피를 토하고 설사를 하며 설핏, 잠에서 깨는 것 같았다. 그는 희미한 의식으로 아련한 통증을 느꼈지만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준과의 통화는 거르지 않았다. 아내는 밤늦도록 일하느라 준의 저녁을 챙겨 주지 못했다. 엄마가 없어서인지 준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서둘러 시골로 내려오지 않았으면 지금쯤 준의 저녁을 챙겨주고 있었을 텐데 하며 며칠 더 머물다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뭐든 맛있게 먹는 준을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만들어준 음식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토마토를 넣지 않은 미트볼 스파게티였다.

평일에는 산책을 하고, 마트를 가고, 저녁을 준비하고, 배드민턴을 치고, 주말에는 계곡에 텐트를 치고, 낚시를 했다. '자식이 옆에 있으면 없던 힘도 생기는구나.' 불과 일주일전의 일이다.

“이번에 올라가면 강아지도 분양받고 아빠랑 노래방도 가자.”

집안 형편 탓에 좋아하던 수영을 그만 두더니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몸이 많이 불었다. “아빠, 강아지 키우게 해주면 살 뺄게요.” 준이 자주하던 말이 떠올랐다. 준은 낯가림이 심해서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막내의 노래 부르는 모습이 궁금했다. 준이 어찌나 좋아서 소리를 질러대는지 L은 노래방에 가자는 그 다음 말을 되풀이 하지 못했다.

전등을 켜지 않은 실내는 이미 낮보다 어두웠다. 풍경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L은 끙끙 거리며 일어나 커튼을 거두었다. 갑자기 유리창으로 '후두둑!' 빗방울이 부딪혔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렸다. 이따금 거실이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가뭄 끝에 내리는 비가 왠지 좋았다. 창문을 열었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와 바로 앞 건물의 실루엣과 가로등 불빛 말고는 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된 것처럼 사방에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습한 바람이 푸석해진 살갗을 적셔 주는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못 박힌 듯 서서, 오랜만에 찾아든 감성에 젖어 들었다. 묵묵히 고요에 파묻힌 집을 둘러보았다. 들추어 내지 않으면 영원히 묻힐 것 같은 과거의 흔적들이 의미를 상실한 채 무덤처럼 잠잠했다. 고독은 그의 심장을 관통해 아주 빠른 속도로 일상의 경계를 허물었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천둥과 함께 자신의 몸속에서 수천 개의 세포들이 폭발하거나 끊임없이 뒤섞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섰는데도 다리가 아팠다. 다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았다. 삶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음울한 분위기라도 아직 앳된 얼굴인 준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남은 종양 세 개를 시술하고 나면 더 열심히 살아서 아들 장가가는 것은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잠들어있는 동안 하루의 대부분이 꿈처럼 사라졌다.

밤사이 비가 그치고 태양빛은 또 다시 거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L은 하루 종일 이불 속에 누워 아내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아내도 L에게 택배를 보냈다고 전화를 했다. 내일이면 도착할 것이라고 아내가 말했다. 택배가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으면 마음을 놓을 수 있으니 택배가 도착하면 전화 한통화만 넣으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하루가 다 저물어가도 연락이 없어서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내가 택배회사에 전화를 걸어 보겠다고 했다. 세끼를 굶고, 여섯 번이나 설사를 한 뒤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택배가 밀려서 내일 오전에 배달 오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몸은 괜찮아요?”하고 안부를 물었다. L은 “생각해보니 다음 주에 올라갈 건데 괜히 택배를 보냈어.”하고 아내에게 말했다. 통화를 하는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게 죽을 만큼 큰 고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L은 출판 사업을 했었다. 논술 학습지를 새롭게 제작해서 가을에 출판할 계획으로 봄부터 여름까지 유명한 강사들을 영입했다. 성공만 한다면, 그동안 투자했던 돈의 수십 배를 벌어들일 것으로 확신했다. 논술 비중이 늘어난다는 대학입시제도는 소문으로 막을 내렸다. L의 아내가 더 이상 투자는 무리니까 여기서 멈추자는 말과 함께 “돈 보다 중요한 게 사람 목숨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 돈이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것을 알아요. 알면서 대출 받았어요. 마지막이에요. 서둘러 결정을 내려요. 우리에겐 지켜야 할 아들이 셋이에요.” 그는 아내의 말에 꿈쩍하지 않았다. L은 이미 몇 천 만원이나 몇 억의 개념을 상실한 뒤였다. 수시모집에서 입학사정관제도가 특목고 출신을 우대한다고 했다. “특목고를 보내기위해 초등학교부터 선행학습에 들이는 사교육비가 전체소득의 반 이상을 지배하고, 우리나라 입시제도는 1945년 해방이후 평균 사년에 한 번씩 십육 차례나 바뀌었어. 언제부터 교육정책이 사교육을 줄이기 위한 정책으로 바뀌었는지 말이야.” L은 사업실패의 원인이 교육정책 탓이라고 말했다. “교육은 대학을 가기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자하는 행위야.” 아내는 L이 만들고자 했던 논술학습지가 수단도 행위도 될 수 없었나를 잠시 생각했다. L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분별없는 투자를 했는지, 속으로 한탄했다. 팔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팔아 빚을 갚아도 남은 빚은 여전히 산더미 같았지만 아내는 L의 실패를 따지지 않았다. 아내는 지난 실수보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L의 전망 좋은 사업을 위해 아내는 전망 좋은 집을 팔아야 했다.

L이 오피스텔에 홀로 머무르는 동안, “아내가 그동안 얼마나 우울했을까를 생각하면서 평생에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그를 찾아온 후배에게 말 한 적이 있다. 결혼 후 그의 퇴근 시간은 밤 열시 이후나 어둠이 걷히는 푸른 새벽이었다. 육아로 인해 재택근무 중이던 아내는 만나는 친구도 없었고, 친정을 자주 가는 것도 아니었다. L은 직장동료들과의 유대관계가 좋을수록 집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지만, 가족과 직장은 얻는 게 아니라 지키는 거라며 후회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도 했으며, 온라인 영어 학습 회원을 모집하는 지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도무지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갑과 을의 계약을 했었다. 영업 본부장으로서 을이 지켜야할 당연한 의무는, 목표매출액 달성과 이익창출이었다. 본부장이 회사 내 유능한 직원과 마찰이 있으면 타 본부로 발령 처리 할 것이며, 당리당략이나 정에 얽매여 일하지 말 것이며, 갑의 별도지시가 없는 한 음주를 동반한 회식은 금지할 것이며, 본사 정책이 다소 미흡하더라도 딱 잘라 비판하지 말고 노력의 의지를 보여줄 것. 이러한 사항을 성실히 수행하는 본부장은 계속해서 기용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본부장은 인사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맥락이었다. L은 본사에서 처벌이 내려지기 전에 계약을 해지하고 말았다.

사업체 폐업당시 임차보증금은 월세가 밀려서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상실의 원인에는 주식투자도 있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십년 후엔 좋아질 것 같은 회사를 장기투자로 선택하려고 했었다. 서두르지 말라, 조급해하지 말라, 하늘을 선회하면서 송골매가 병아리를 채가듯이 지켜보자. 확신이 섰을 때는 망설이지 말고 배팅하자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다짐만 되풀이 될 뿐이었다. 모든 것은 짐작일 뿐이다.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기 마련이다. 시대가 어떻게 흘러갈지,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는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L의 삶과 죽음은 주식시세와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살고자 하는 욕망이 치솟다가도 오후 네 시를 넘어서면 죽고 싶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는 온갖 고수들이 판치는 정글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작은 흐름에 쉽게 휘둘렸다. 시세가 상승기류를 타면 사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고, 하강기류에 놓이면 불안감에 팔 수 밖에 없었다. 사면 떨어지고, 팔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올라갔다. 잃은 돈을 만회하기위해 돈을 빌리는데 한계를 두지 않았으며, 그만둘 때를 알지 못하고 끈질기게 밀어 붙였다. 처절한 도박이었다. 한번 무너지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평정심을 잃었다. 결과는 뻔했다. 손해로 막을 내렸다. 그는 자기 자신이 저평가 되어있어 투자만 받으면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아무도 다시는 그의 인생에 격려와 지지를 하지 않았다. 사실, 세상은 실패에 그다지 너그럽지 못하다.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났다. 그의 '인생한방'은 도박이었다. L은 세상의 끝을 보는 것 같았다. 오피스텔 보증금을 잃고 사채까지 늘었다. 식후 혈당은 400을 넘었고, 몸은 구석구석 성한 곳이 없었다. 자주 피곤했고 쉽게 지쳤다. 한때 잘나가던 시절의 동료와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어진지 오래다. L은 매일매일 어떻게 일어서야 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죽어야할지 몰라서 고민했다. L은 과거의 돈을 회수할 수도, 늘어나는 빚을 줄일 수도 없다고 단정 지었다. 마흔 아홉, L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돈 때문에 죽음을 생각했다.

그 후, L에게 삶의 의지가 강렬했던 때가 한 번 있었다. 시골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맞이하는 첫 명절이었다. 세 아들을 버스에 태워 보내려니 마음이 서글펐다. 늘 막내가 걸렸다. 정기검진도 받아볼 겸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주기로 마음먹고 나니 가져갈 것이 많았다. 과일 한 상자와 기관지가 약한 아내를 위해 배와 도라지를 넣어 즙을 낸 박스가 두 개, 햅쌀 한 자루와 고구마 한 상자를 실었더니 트렁크에 가득 찼다. L의 어머니는 변함없이 그동안 쓰지 않고 모아 두었던 돈을 허리춤에서 꺼내 손자들 손에 '꼬옥' 쥐어 주었다. 그녀는 첫 아들인 L을 낳았을 때처럼 첫 손자 현을 보았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 L이 어머니나 쓰시라며 극구 말려도 너는 참견하지 말라며 아들에게 화를 냈다. 다행히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았다. 상행선이었고 서둘러 출발한 탓에 고속도로 진입은 순조로웠다. 단지, 속이 타는 듯이 쓰려서 신경이 쓰였다.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전에 주유를 하고 나서 화장실에 들러 대변을 보는데 온 몸에 땀이 났다. 지난밤에 늦게 잔 것도 아니고, 잠을 설치지도 않았고,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졸리기까지 했다. 긴장하면서 운전을 했는지 또다시 배가 아팠다. 첫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보고는 손을 씻으면서 침을 뱉었는데, 울컥 하더니 검붉은 피가 나왔다. 덜컥 겁이 났다. 식도 정맥이 터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 피가 나지 않아 다시 출발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세 아들을 생각하며 희미해지는 의식을 잡았다. 두 번째 휴게소에 들렀다. 상복부가 부풀어 올랐다. 통증이 몰려왔다. L은 더 이상 운전을 계속 할 자신이 없었다. 쉬어야 할지 그대로 서둘러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세 아들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마주쳤을 때, L은 뒤돌아 볼 것도 없이 그대로 시동을 걸었다. 사고가 날 뻔했던 순간도 있었다. L은 휴게소 마다 들러서 십분 정도 쉬었다. (L은 아내에게 휴게소에서 오랫동안 쉬지 않은 것이 자신을 살렸다고 말했다.) 서서히 차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복통이 심해졌다. 통증이 심해져서 집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L은 집이 아닌 병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아내에게는 병원으로 와서 세 아들을 데려가라고 전화했다. L이 응급실로 달려가서 의사에게 말하려는데 토하듯이 피가 쏟아져 나왔다. L의 아내는 그가 약 2L정도를 토했으며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말을 담당의사에게 들었다. L의 예상대로 식도 정맥이 터졌다. 검사를 받고 시술을 하는 동안 간경화로 복수가 찼고, 간성혼수가 왔다. 병원에서는 회복 될 가능성이 희박하므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그는 십일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는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죽음의 문턱을 넘지 않고 살아 돌아온 그는 어떤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뭔가 달라질 것 같은 막연한 기대에 사로잡혔었다.

L은 환자를 시체 취급한다며 간호사들을 욕하거나 불편한 환경을 비난했다. 팔 다리가 묶인 중환자에게 기도가 막힌다며 한모금의 물도 허락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원망했다. 아내에게 물 좀 달라고 하소연 했지만 물을 적신 거즈만 물리게 했다. 현의 연락을 받고 늦게 도착한 동생들은 그를 언짢아하거나 낯선 사내를 대하듯 했다. 그들의 생일을 챙기고, 매 달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하거나, 부모의 병원비, 혹은 그 외 대부분의 지출이 L에게서 일어났지만 말 그대로 그 모든 것은 과거가 되어버렸다. L이 실패자가 되는 순간부터 그들에게는 회피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L의 나락을 외면했다.

동생의 집에 머물었던 짧은 기간 동안, 제수는 그와 관계된 현실이 억울하다며 매일매일 시부모에게 하소연했다. L이 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거나 돈을 빌린 적은 없지만 시골 땅의 일부를 팔아 아들의 회생을 도우려 했던 부모를 형 대신 원망했다. L의 아내는 별다른 불평 없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녀가 묵묵히 일만 하며 사는 동안, 삼십대의 절반을 잃어 버렸고 무기력한 사십대는 저절로 찾아왔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슬프면서도 당차보였다. “제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야 해. 남의 손을 잡다 보면 자꾸 의지하게 되거든.” 그녀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젊은 딸이 안타까웠다. “자식은 엄마 복을 닮는다더니만.”

L은 점차적으로 간암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력해지는 L의 심장은 아이들과 어머니를 생각할 때 잠깐씩 뜨거워졌다가도 금시에 쇠약해져서 급하게 식었다. 몇 차례 시술과 혼수를 겪고 나더니 L은 환갑을 넘긴 초로의 얼굴로 변했다. 해병 수색대 출신으로 서른 명의 직원을 두었던 사업가의 늠름한 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헐렁한 추리닝을 입었고 퉁퉁 부어오른 발 때문에 겨울에도 슬리퍼를 신었다. 더 이상 그가 보낸 문자에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다.

L은 여전히 재기를 위해 끊임없이 사업을 구상했다. 화장품원료나 낚시미끼로 쓰이는 지렁이 사육을 해볼까. 시골집을 팔아 평수적은 연립주택을 얻은 나머지를 투자해 게스트 하우스를 차려볼까. 시골집 근처에 칼국수 식당을 차려 볼까 하는 사이 몸은 점점 더 수척해지고 무능해졌다. L은 의사로부터 시각장애, 언어장애, 어지럼증이 그 원인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도 “내가 왜 이러지”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L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증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그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불장에 있는 이불을 죄다 꺼내와 바닥에 깔았다. 오직 오늘밤만 견디자는 것 외에 아무런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주 빠른 속도로 혈관이, 심장이, 보이지 않는 몸 속 구석구석이 타들어가는 듯 했다. 모든 신경세포가 되살아나 통증을 극대화 시켰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숨을 헐떡이며 틀어막았던 입을 벌리자마자 신음이 터져 나왔다. L은 있는 힘껏 부르짖었다. 정육점 친구는 잠결이었지만 심상치 않은 비명을 들었다. 옷을 대충 걸치고 L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미 이불위에는 붉은 피와 토사물이 참혹할 정도로 가득했다. 정육점 친구는 구급차를 불렀다.

혼자 쓸쓸하게 절규하는 그 순간에도 L은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생명이 한계에 도래했다는 것을.

L의 아내는 출근하기 전, 현에게 두 가지 당부를 했다. 아빠가 보내준 택배가 도착할 것이니 잘 받아 두라는 것과, 받고 나서 아빠에게 전화를 하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L이 시골집으로 내려가던 날이 떠올라서 기분이 언짢았다. 그날 오후, L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현의 습관을 나무랬다. “저도, 그것 때문에 몹시 화가 나지만 참고 있어요. 지금은 우리가 야단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현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현의 습관이 자신의 교육 탓이라고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속상했다.

“내가 백프로 장담하지만 저런 습관의 아이들은 성공할 수 없어.”

어쩌면 자기 아들을 저런 식으로 낙인 할 수 있는지 L의 부정적인 말이 아내를 자극했다.

“그래요, 내 탓이에요. 그래도 나 나름대로 아들 셋 제대로 키워보려고 얼마나 기를 쓰고 살았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해요?” 아내는 지난 서러움을 토로하듯이 L을 향해 마구 쏟아 부었다. L은 말없이 짐을 챙겼다. 아내도 할 말을 잃어 잠시 감정을 삭이기 위해 의자에 걸터앉았다. “집에 가서 정리할 게 있어서 잠깐 다녀 올 게.” 아내는 화를 내서 미안하다는 말과 내일이면 견이 방학을 해서 오니까 보고 가라는 말을 하려다 말고 침묵했다. L은 그대로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내는 견의 방으로 가서 베란다 문을 열고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남편의 흰 정수리와 허물어진 등짝이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아내는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문자를 보냈다. '내가 속상해서 말실수 했어요. 가지 마세요.' 남편이 바로 답을 보냈다. '괜찮아, 어차피 가야해. 병원에 제출할 서류를 준비해야 돼. 다음 달에 또 볼 텐데 뭐. 견에게는 내가 전화할게.'

그와 마주보며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 그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였다.

아내가 회사에 도착해서 출입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 문자가 도착했다. '고객님 택배를 오늘 배달예정입니다.'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진동이 울렸다.

“저는, 그러니까. 고향친굽니다.”

그는 다짜고짜 L을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중이니 한 시간 후면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현에게 전화를 걸어 택배는 경비실에 맡겨달라고 할 테니까 응급실로 가보라고 했다.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다 보니 현과 아내는 담담해졌다. 현과 아내는 이번에도 간단한 시술을 받고 나면 며칠 입원을 했다가 퇴원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도 아빠 친구로부터 L이 위급한 상황이라는 전화를 받은 후라 알고는 있었지만, 간만에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틀어져서 마음이 상했다. L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던 날, 현은 아빠에게 간이식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아빠는 약만 잘 챙겨 먹으면 낳을 수 있어.”하고 가벼운 감기환자처럼 말했다.

L의 아내는 사무실 정리를 마치고서 컴퓨터 파워 버튼을 눌렀다.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아내는 길게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젊은 남자의 말은 다급해서 알아듣기 어려웠다.

“환자가 지금 위급상황이라서 기도 삽관을 해야 합니다. 보호자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하시겠습니까?”

아내는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환자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기도삽관'과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말이 그녀의 예민한 신경을 자극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내는 순식간에 사무실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가서 도로에 뛰어들며 “제발 살려만 주세요.”하고 정신없이 외쳐댔다. '헉헉'대는 숨소리가 허공을 떠다녔다. 택시를 불렀다. 그가 죽을까봐 두려웠다. 혼수상태일 때도, 시술을 할 때도, 의사들은 한 결 같이 이번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지만, 그는 보란 듯이 깨어났고 살아났다. 그들의 말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들렸었다.

아내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응급실로 달려갔다. 저만치서 먼저 도착한 현이 손을 번쩍 들었다. 기도삽관을 하고 난 뒤라 남편은 말을 하지 못했다. 아내는 L의 퉁퉁 부은 손을 잡았다. “나를 알아보겠어요?” L은 손에 힘을 주었다. “준이랑 약속도 했다면서요. 빨리 깨어나서 집에 가요!”

아내는 혹시라도 L이 준의 이름을 들으면 억지로라도 깨어 날 것 같았다. L은 아내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의사가 다가와서 아내를 불렀다. 의사는 모니터를 보여주며 학술적인 말을 늘어놓았다. “간세포암의 파열에 의한 혈복강 가능성이 높겠고, 잔존 간기능이 적어 시술 합병증 발생 가능성 그러니까 출혈, 감염, 패혈증, 쇼크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내원 당시 의식 저하에 입에서 거품을 물고 있었어요. 승압제 유지하며 경과 추적 중이지만 예후 불량하겠고 사망가능성이 높아요.” 언제나처럼 그들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준비를 해두세요. 오늘을 넘기는 것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가까운 분들께 연락하고, 환자분은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 같은데 여기 오기 전부터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희는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해볼 것입니다. 그래도 일단은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세요.”

불행하게도 마지막 말에는 내성이 생겨서 아내와 아이들은 그가 다시 깨어나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했다. L은 한동안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 했다.

L이 중환자실로 옮겨지는 동안, 아내는 L의 형제와 그녀의 형제들에게 연락했다. L의 동생들은 많이 바쁘다고 했다. 그동안 몇 번의 혼수상태를 거치며 그들도 이번 연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아내는 견과 준에게 저녁 무렵에 전화를 걸어 아빠를 보러 오게 했다. “아빠가 깨어날 때까지 옆에 있다가 아빠랑 같이 집에 가자.”며 아내와 현은 집에 가지 않았다. 보호자 대기실에는 누울 수 없는 팔걸이의자가 놓여 있었다. 낮에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밤이 되면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잠을 잤다.

아이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빠가 깨어 날 것이고, 깨어나게 되면 그전처럼 영화를 같이 본다거나 동네를 산책한다거나, 마트에 장을 보러가는 일처럼 일상적인 일들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견과 준은 떨어져 있기 싫다며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견은 가끔씩 집에 들러 집안 정리를 하거나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왔다. 준은 견을 따라다녔다. 현은 엄마의 말대로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날이 바뀔 때마다 오늘을 넘기기 어렵겠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다. L은 여전히 눈을 맞추거나 손끝에 힘을 주어 아내의 말에 반응했다. 아내는 L이 삶과 죽음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라서 삶 쪽으로 기울어지면 깨어날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간호사나 의사들은 무의식이거나 수면 중이라고 했다. 점차적으로 아내는 지쳐갔지만, L에게 듣고 싶은 마지막 한 마디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L의 과거는 빠르게 사라지고 오지 않은 미래의 많은 날들은 그대로 멈출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L이 아내에게, 혹은 그의 세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떠나버린다면, 편히 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견은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금방이라도 상태가 악화되어 돌아가실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는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방문을 미루기만 했다. 담당의사가 전화했을 때는,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내와 세 아들은 오늘의 일상과, 어제의 기억과, 앞으로의 약속을 L에게 말했다.

두터운 살갗은 흰 빛이 사라지고 몸집은 육중하고 거대해져 갔다. 눈꺼풀은 열려 있지만 초점은 흐릿했다. 온갖 종류의 선들이 혈관처럼 매달려 있었고 구불구불한 선은 L의 희박한 생명을 보여주고 있었다.

L은 팔다리가 묶이고, 기도삽관으로 입은 막히고, 안구 보호를 위해 거즈를 붙이고, 심장은 뛰고 있지만 의식은 사라져 버렸다.

아내는 팔과 다리의 미동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삶 쪽으로 끌어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손을 꼬집기도 하고 옆구리를 간질이기도 했다. 그가 미간을 찡그리는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부풀대로 부풀어 팽창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L은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L이 언젠가는 자신보다 먼저 떠날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일찍은 아니었다.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은 어쩌면 더한 고통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가 떠날 시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은 누구도 정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사람이 닿을 수 없는 한계가 왔을 때, L은 서서히 그들을 떠나가고 있었다. 그가 막, 들어 선 곳이 입구인지, 출구인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는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택배가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오늘' 택배가 잘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루만 더 버티면 아내가 보낸 택배를 받을 수 있다. L은 할 수 있는 한 견디려 했다.

그의 아내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하기만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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