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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신년특집 신춘문예 당선작]황금살구

동화 조규영

◇그림=조남원기자 cnwon@kwnews.co.kr

나는 태식이를 노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식이가 가소롭다는 듯 씨익 웃었다.

“싸우겠다는 거냐?”

태식이가 손가락을 꺾어 뚜둑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태식이 주먹이 날아왔다. 휙, 휙, 나는 피하기 바빴다. 또다시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내 배에 꽂혔다.

“퍽!”

배를 한 대 맞았을 뿐인데 머리에서 찡찡찡 비상벨이 울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원래 계획대로 됐다면 나는 태식이를 쓰러트리고 이렇게 소리 질러야 한다.

'너 대신 닭장 청소 못 해. 더 이상 괴롭히면 나도 가만히 안 있어!'

하지만 내 입에선 다른 말이 나왔다.

“항복, 항복. 너 대신 닭장 청소 내가 할게.”

나는 한 대라도 덜 맞는 게 중요했다.

“박동구, 아니지. 오늘부터 넌 닭똥구야. 한 달 동안 수고해라.”

나처럼 평범했던 태식이가 어떻게 갑자기 힘이 세지고 싸움을 잘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태식이와 나는 삼 년 넘게 같은 태권도장에 다니며 흰 띠부터 시작해서 얼마 전 검은 띠를 따고 그만둘 때까지 실력도 막상막하였다. 도장에서의 대련과 실제 주먹다짐이 다르긴 하겠지만 갑자기 변한 태식이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얼마 전부터 싸움 좀 한다는 우리 반 남자아이들이 태식이에게 무릎을 꿇었고, 나같이 힘없는 애들은 한 방에 훅 갔다.

난 원래 우리 반에서 중간은 갔다. 공부든 운동이든 싸움이든. 하지만 요새는 반에서 거의 밑바닥 취급을 받는다. 그건 다 새로운 쌈짱으로 등극한 김태식에게 찍혔기 때문이다.

“하이야, 호이야, 이야압, 흐이야압.”

일주일 전 청소 시간이었다. 다른 애들이 걸레를 빨러 화장실에 가서 교실에는 태식이와 나 둘만 있었다. 태식이는 청소는 하지 않고 대걸레를 들고 막대기 권법을 연마한다면서 이리저리 휘둘러댔다. 그러다가 태식이의 대걸레는 급기야 벽시계를 치고 말았다. 시계는 와장창 깨졌다.

태식이는 자기가 시계를 깼다는 걸 담임 선생님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협박했다. 태식이는 시계를 내가 깬 걸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다음 날 시계 깬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담임 선생님한테 사실 대로 말해버렸다.

담임 선생님은 바로 태식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쉬는 시간에 태식이 엄마가 갑자기 들어오더니 새로 사온 벽시계를 걸었다. 뒷문으로 나가면서 태식이를 향해 눈을 부라렸는데 얼마나 무섭던지 으스스 떨렸다. 태식이는 자기 엄마가 나가자마자 뱀처럼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매섭게 날 쏘아 보며 말했다.

“동구, 너 나한테 딱 걸렸어.”

태식이는 요즘 담임 선생님 책상 옆에 놓인 개구쟁이 길들이기 자리에 자주 앉았다. 그런데도 태식이에게 당하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태식이의 벌점은 자꾸만 늘어났다. 담임 선생님은 태식에게 한 달 동안 닭장 일을 하라고 하셨다. 우리 학교는 감성을 키우는 혁신 학교로 지정되어 학교 뒤뜰에 닭과 토끼를 키우고 텃밭을 가꾸었다. 선생님들은 닭이랑 토끼를 기르면 없던 아이들 감성이 막 생기는 줄 착각을 하나 보다. 우리 반 담당은 닭장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닭장 관리를 벌주기 방법으로 이용했다.

결국 태식이와의 싸움에서 진 내가 그 벌을 옴팡 뒤집어썼다.

점심 시간에 모이를 주려고 닭장에 들렀더니 난리가 났다. 닭장 안에는 다섯 마리의 닭들이 있다. 두 마리는 수탉, 세 마리는 암탉이다. 닭장 안은 늘 싸움짱 수탉이 시들시들한 수탉 한 마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오늘도 싸움짱 수탉이 팔짝팔짝 뛰며 그 시들시들한 녀석을 공격했다.

싸움짱 수탉은 펄쩍 뛰어올라 녀석 몸에 거세게 부딪쳤다. 녀석은 도망가기 바빴다.

'비겁한 자식. 힘없는 녀석 괴롭히기나 하고…….'

난 얼른 빗자루를 닭장 철망 안으로 들이밀었다. 싸움짱 수탉을 빗자루로 쿡쿡 찌를 듯이 위협했다. 싸움짱 수탉이 퍼드득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녀석은 얼른 닭장 구석으로 돌아가 오들오들 떨었다.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구석자리 녀석의 모이그릇에 모이를 많이 부어주고 얄미운 싸움짱 쪽 그릇에는 안 줬다.

“꼬꼬꼬꼬.”

그새 다급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틈에 싸움짱이 녀석을 마구 쪼아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또다시 공격을 받을 것 같아 얼른 싸움짱 쪽 모이그릇에도 모이를 줬다. 아마 내가 따로 그 녀석에게 모이를 주지 않으면 모이 한 톨 얻어먹지 못할 거다.

닭장 문을 걸어 잠그고 있을 때였다. 닭장 옆 텃밭 뒤편에 태식이가 보였다. 날 감시하러 왔나 하는 생각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춰 숨었다. 그런데 태식이가 주위를 살피더니 잽싸게 무언가를 손에 쥔 채 황급히 운동장 방향으로 걸어갔다.

'어? 뭐지? 동그스름한 게 무슨 공 같기도 한데. 왜 주위를 살핀 거지?'

나는 태식이를 몰래 따라가 보았다. 태식이는 그걸 수돗가에 가서 닦더니 우적우적 먹었다.

그날 오후 태식이는 4학년 교실 앞 복도에서 힘세 보이는 다른 반 아이와 한 판 싸워 이겼다. 수업 후 축구 시합에서도 운동장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이리 뛰고 저리 뛰더니 강력 슈팅으로 혼자 세 골이나 넣었다.

난 태식이가 먹은 게 뭔지 궁금해졌다. 하굣길에 닭장 근처를 찾아보기로 했다.

닭장 안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또 싸움짱이 녀석을 괴롭히나 보았다. 난 옆에 놓여있는 빗자루를 손에 들고 막 철망 속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늘 구석에 처박혀 있던 녀석이 싸움짱과 싸우고 있었다.

싸움짱과 녀석이 펄쩍 뛰어올랐다. 녀석이 날개를 퍼덕이며 싸움짱의 공격을 막았다.

저러다 물려죽는 건 아닐까? 난 녀석이 걱정되어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여차하면 싸움짱을 빗자루로 위협해서 떼어내야 했다. 난 빗자루를 꼭 쥐고 준비태세를 갖췄다.

깃털이 날리고 꼬꼬댁 울음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리의 주인공은 녀석이 아니라 싸움짱이었다. 녀석의 날라차기는 놀라울 정도로 힘찼다. 녀석의 발은 싸움짱의 깃털 속살을 움켜쥐었고, 녀석의 부리는 그간의 분을 풀려는 듯 사정없이 여기저기 쥐어뜯으며 마구 쪼아댔다. 싸움짱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암탉들 뒤로 숨었다.

이제 보니 녀석은 외모부터 달라진 것 같았다. 머리 위에서 늘 힘없이 옆으로 누워있던 닭 벼슬이 꼿꼿이 서 있었다. 검정 깃털에서도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때였다. 당당하고 위엄 있는 걸음걸이로 구석의 자기자리로 돌아간 녀석이 반쯤 먹다 남은 살구를 쪼아 먹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황금빛 살구였다.

싸움짱은 녀석을 피해 도망친 후 초조한 듯 구석자리로 숨었다. 이제 싸움이 끝났나 싶었는데 싸움짱이 닭장 가운데로 어슬렁 오니까 갑자기 녀석이 싸움짱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차 전이었다.

녀석은 다시 한 번 날듯이 달려 나가 몸을 공중으로 날린 다음, 싸움짱의 목을 물어뜯었다. 싸움짱의 목에서 피가 투두둑 떨어졌다.

“꾸에에에엑.”

싸움짱의 외마디 비명이 닭장 안 팽팽한 공기를 갈랐다.

“꼭꼬오오옥.”

녀석이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싸움짱은 녀석과 반대편 쪽 구석에 딱 붙었다. 녀석이 다시 황금빛 살구를 먹었다. 어쩜 저런 광채가 나는 살구가 있을까 신기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저 살구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혹시 마법의 살구?'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살구가 어디서 굴러 온 건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닭장 뒤쪽 학교 담장 바로 뒤부터 시작되는 뒷산의 우거진 나무들이 웅성웅성 대며 이파리들을 흔들어댔다.

담장 앞 바닥에 연한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물든 살구들 서너 개가 떨어져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떨어져 시커멓게 변한 살구들에는 파리랑 개미들이 달라붙어 썩어가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담장 바로 앞에 살구나무가 있었다. 눈에 띄게 빛을 뿜어내는 황금 살구 두 개가 눈길을 확 끌었다. 바닥에 뒹구는 살구와는 빛깔이 확연히 달랐다.

햇볕 아래 반짝반짝 황금빛으로 빛나는 살구. 바로 저거였다. 싸움짱을 이긴 녀석이 먹던 황금 살구. 분명 태식이도 저 황금 살구를 먹고 갑자기 힘이 세진 거였다. 드디어 태식이의 숨겨진 비밀을 풀었다. 태식이는 황금 살구를 먹고 그동안 거들먹거리며 힘자랑을 했던 거다. 그런데 중요한 건 황금 살구가 이제 두 개밖에 안 남은 거다.

난 까치발을 한 채 겨우 황금 살구 한 개를 땄다. 나머지 한 개는 너무 높은 곳에 매달려 있어서 따기 어려워보였다.

황금 살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시큼하고 달큼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근육에 힘이 불끈불끈 솟았다. 머리 끝까지 탁 트이는 듯한 찌릿찌릿한 에너지가 온몸을 돌았다.

살구를 마저 먹은 다음 학교 운동장으로 가 보았다. 마침 아는 아이들 다섯 명이 놀고 있었다. 내가 닭싸움을 하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놀랍게도 나는 다섯 아이들을 모두 넘어트렸다. 우리들이 노는 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운동장 한 쪽에 닭싸움 판이 벌어졌다. 나는 그날 대결한 열두 명의 아이들 모두를 이겼다. 이게 다 황금 살구 덕분이었다.

난 다시 살구나무로 갔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휘둘러 겨우겨우 마지막 황금 살구 한 개를 땄다. 이걸로 내일 태식과 결전을 치를 거다.

다음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난 태식이 앞을 가로막았다.

“김태식, 오늘부터 닭장 청소 네가 해.”

“어쭈, 닭똥구. 너 죽어 볼래?”

태식이가 흰 이를 드러내며 험악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 김태식, 나랑 한 판 붙자.”

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태식이를 노려보았다.

“좋아. 닭똥구, 네 덕에 오늘 몸 가뿐하게 풀겠네. 오늘 내가 중요한 축구 시합 한 판 떠야 하니까 한 시간 후에 닭장 앞으로 나와.”

태식이가 왈칵 나를 떠밀며 말했다.

태식이 자식, 오늘 지가 어찌 될 지도 모르고 까불고 있었다. 더 이상 황금 살구가 없는 줄도 모르고. 난 아까 어제 따놓은 마지막 황금 살구를 미리 먹어 놓았다.

닭장으로 갔다. 그런데 녀석이 이상했다. 꼿꼿이 섰던 닭 벼슬이 다시 예전처럼 옆으로 누웠고, 깃털은 푸석푸석거렸다. 팽팽하던 녀석의 기운도 빠져나간 듯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닭장을 살펴보았다. 군데군데 닭똥이 쌓여 있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어제 나도 똥을 싼 후 넘쳐흐르던 기운이 사라졌던 것 같았다. 황금 살구는 소화가 되어서 똥이 나오면 그 효력이 사라지는 걸까?

순간 아랫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꾸울꺽, 긴장해서 저절로 목울대로 침이 넘어갔다. 이십 분쯤 똥구멍에 힘을 주고 참았더니 뱃속이 더 부글부글 끓었다. 안 된다. 절대 똥을 싸면 안 된다.

'으으윽,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안 돼! 망했다. 망했어.'

싸기 일보 직전이다. 난 화장실로 뛰려고 했다. 하지만 똥을 너무 억지로 오랫동안 참은 게 탈이었다. 난 책가방 앞주머니 속 휴지를 챙겼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주춤주춤 닭장 뒤편으로 겨우 숨어들었다. 풀숲에 쭈그리고 앉자마자 설사가 나왔다.

“꾸루룩 꾸루룩 후드드득.”

그때 토끼장 뒤쪽에서 소리가 났다.

'후드둑 흐드드드득.'

누군가 엄청난 설사를 해댔다. 금세 똥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는 얼른 뒤처리를 하고 일어섰다. 그런데 나랑 함께 엄청난 구린 냄새를 피운 그 누군가는 바로 태식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째려보았다. 갑자기 태식이가 물었다.

“똥구야, 혹시 휴지 있냐?”

“너, 휴지도 없이 무슨 생각으로 똥을 싸댔냐?”

“참을 수 없어 그랬지.”

“너, 휴지 주면 앞으로 닭장 청소 니가 할 거지? 어쩔래, 나 이만 갈까?”

“알았다. 알았어. 휴지나 줘라.”

“딴 말 없기다?”

“알았다구. 혹시 똥구, 너도 살구 먹었냐?”

“비밀이다.”

“쳇, 치사한 자식!”

나는 태식이에게 휴지를 던져 주었다. 태식이가 쭈그리고 앉아 중얼거렸다.

“사물함에 넣어 놨던 마지막 살구를 먹고 왔는데 설사해 버렸네. 에휴 아까워.”

태식이가 왠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나는 그간 궁금했던 것을 슬쩍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아이들과 싸운 거야?”

“기훈이한테 내가 여러 번 맞았던 거 넌 모르지?”

기훈이라면 다른 아이들을 자꾸 괴롭혀서 부모가 창피하다고 전학시켰던 아이다.

“걔한테 여러 번 얻어맞고 돈도 뺏기고 하면서 난 강해지고 싶었어. 근데 이젠…….”

난 태식이에게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다.

“하여튼 닭장 청소, 앞으로는 네가 하는 거지?”

“알았다니까. 오늘 일은 비밀이다.”

“글쎄. 일단 네가 나한테 어쩌는지 좀 보고…….”

태식이의 부탁 한 마디에 나의 뾰족했던 마음도 슬슬 내려앉았다.

“황금 살구 따 먹던 좋은 날이 지나고 나니 나에겐 벌 청소만이 기다리고 있네.”

태식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태식아, 내년에도 혹시 황금 살구가 열릴까?”

내 물음에 태식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열리면 우리 그거 먹고 세기의 대결을 벌여보자. 헐크 대 슈퍼맨급이잖아.”

태식이가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난 닭장 쪽으로 쓰윽 눈을 돌렸다. 그 녀석은 황금 살구가 없어도 싸움닭에게 더 이상 밀리지 않았다. 녀석은 눈을 부릅뜨고 닭장 한가운데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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