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역사속의 강원인물]젊은 무인의 혼이 잠든 이곳에서 전설은 저절로 역사가 된다

김도연 소설가와 함께 떠나는 충무공 김응하를 찾아가는 길

①철원 한탄강 상류에 위치한 칠만암은 조선 광해군 때 이 고장 출신 명장인 충무공 김응하, 응해 형제가 청년 시절 무과에 급제하기 전에 무예를 닦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무암과 화강암 등 수만 개에 달하는 기암괴석이 한데 모여 기기묘묘한 조화를 이루는 절경을 자랑한다. ②김응하 장군은 광해군 11년(1619년)에 명나라에 원군으로 파병돼 부하 3,000명으로 적군 6만명과 장렬히 싸우다 40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이에 대한 공으로 요동백(遼東伯)으로 봉해지고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에 사당 표충사와 함께 묘비가 세워졌다. ③철원군 철원읍 화지리에 위치한 요동백(遼東伯) 김응하 장군의 사당인 포충사는 현재 정비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철원=권태명기자

남의 나라 도우러 갔다 돌아오지 못한 장수

민통선에 남은 가묘는 방문조차 제한되고

어렵게 찾아간 포충사는 공사자재에 둘러싸여

제대로 둘러보기도 힘들었다

김응하 장군이 무예 연마했다는 '칠만암'

수만 개의 기암괴석이 기기묘묘 조화 이루고

날카로운 기상 드러낸 채 한탄강 굽어보는

호연지기를 기를 만한 곳이었다

무신으로 살았고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는 어떤 신념으로 살았을까

그 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군인으로서의 자기 본분을 지켰다

그를 우러르는 까닭은 오직 거기에 있다

철원에서 길을 잃는 일은 이제 당황스럽지가 않다. 조선 광해군 때의 장군 김응하(應河)를 만나기 위해 왔는데 어김없이 길을 잃었다. 한탄강을 가운데에 두고 남북으로 자리 잡은 철원에 올 때마다 동송읍과 갈말읍의 위치가 헛갈리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김화읍과 철원읍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이 평화로운 곡창지대에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올 때마다 길을 잃어버린단 말인가.

김응하 장군의 사당 포충사(褒忠祠)가 있다는 철원읍 화지리가 갈말 옆에 붙어 있는 줄 알고 찾아갔다가 보기 좋게 허탕을 쳤다. 할 수 없이 내비게이션을 작동시킨 뒤 한탄강을 건너 한참을 달려가 도착한 곳은 포충사가 아니라 철원향교였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내비게이션의 여자는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안내를 종료한다는 말과 함께 숨어버렸고 철원의 산과 평야는 땡볕 속에서 옅은 안개만 피워낼 뿐이었다. 덥고 막막했다.

광해군 9년(1616년) 만주에서 누르하치는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나라를 침범한다. 명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고(1619년) 고심 끝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고 김응하는 좌영장이 되어 전투에 참가한다. 사실 광해군은 출병을 꺼렸지만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기에 거절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강홍립은 명나라 장군 유정의 군사와 같이 동로군에 소속된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는 경솔히 행동하여 곤경에 빠지고 도독 유정은 자살을 한다.

이에 김응하는 부하 3,000명을 거느리고 적의 군사 6만명과 대치했는데 앞에 포병을 내세우고 반격하여 적을 물리쳤으나 전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강풍을 등에 업은 모래바람에 휩싸이자 군사들이 흩어졌고 그는 홀로 버드나무 아래에서 세 개의 활을 사용해 적들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포위돼 전사한다. 그의 용맹에 적군도 그의 정신을 기리어 후히 장사 지내고 유하장군(柳下將軍), 의류장군(依柳將軍)이라 불렀다고 한다. 강홍립은 5,000여명의 남은 군사와 함께 투항했다. 이 사르후 전투(심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명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후금은 만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어렵게 찾은 포충사는 대대적인 공사 중이었다. 사당의 문도 자물쇠가 걸려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묘정비도 공사자재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제대로 둘러보기도 힘들었다. 묘정비는 현종 10년(1669년) 6월 우암 송시열의 글과 사헌부 지평 박태웅의 글씨에 문곡 김수항의 전서제자를 곁들여 제작되었다. 숙종 9년(1683년) 철원 화지리 향교 골에 사당 포충사와 함께 건립되었으나 6·25전란으로 소실되고 묘정비만 초야에 남았다. 이에 당시 3군사령관이 1974년 영내로 옮겨 봉안하다가 철원군과 종중의 이전 요구에 따라 1984년에 환원되었다. 물론 원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강원도는 1985년에 묘정비를 강원유형문화재 105호로 지정했다. 비의 높이는 3.89m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렸다. 나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묘정비 주변을 맴돌았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동생과의 우애가 지극하여 향리에 칭찬이 자자하였다는 김응하 장군. 그러나 그는 남의 나라를 도우러 갔다가 돌아오지도 못했다. 민통선 안에 그의 가묘만 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민통선 안이어서 민간인의 방문도 자유롭지 못한 곳이었다. 알아보니 방문 며칠 전에 신고를 하고 출입허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나의 당일치기 탐방은 더 이상 찾아갈 곳이 없었다. 권태명 기자와 나는 다시 갈 곳을 잃고 뜨거운 길 위에서 누군가를 우두망찰 기다렸다.

김응하의 전사와 강홍립의 항복으로 조선의 정세 또한 시끄러워졌다. 명나라를 지지하는 신하들의 압력으로 광해군은 강홍립의 관직을 박탈했다. 그들은 함께 투항한 장수들의 가족까지 구금할 것을 요청했다. 1620년 강홍립이 귀국하자 옥에 가두거나 명에 보낼 것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홍립이 후금(청)에 조선이 파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관형향배(觀形向背·정세를 살펴보고 행동하라)'라는 밀지를 내렸다고 한다. 후금의 위세로 볼 때 이길 수 없는 전쟁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명에 따라 강홍립은 느림보 행군으로 7개월 만에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장수의 명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 힘쓰라. / 중국의 동쪽군대(동로군)가 매우 약하여 오로지 우리 군대만 믿고 있다니 한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광해군일기).'

결국 강홍립은 항복하고 김응하는 장렬히 전사하는데 학계에서는 김응하의 죽음을 명나라와의 명분외교에 희생양으로 썼다고 해석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전투에서 강홍립은 후금을 달래는 데 사용한 카드였고 김응하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 명나라를 달래기 위한 카드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전투에서 죽어간 수많은 조선의 병사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힘이 없는 나라의 일개 병사들이 감당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날은 몹시 무더웠다. 직탕폭포(直湯瀑布) 입구의 그늘 한 점 없는 교차로에서 철원공감 김영규 선생을 만났다. 김응하 장군이 무예를 연마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칠만암(七萬巖)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기 위해서인데 폭염의 날씨인데도 달려와 준 그의 정성에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칠만암에 대한 그의 글을 간략하게 인용한다.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에 위치한 칠만암은 현무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수만 개의 기암괴석이 기기묘묘한 조화를 이뤄 그리 이름 붙여졌다. 울창한 수림과 옥수같이 맑은 물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소풍지와 천렵장소로 유명하다. 다만 전방지역에 위치해 외지 관광객보다 철원지역민들이 많이 찾는다. 한겨울에는 천연기념물인 두루미들이 집단으로 월동하는 지역이라 더 각별한 보호가 요구된다.' 한탄강 상류의 칠만암 가는 길은 과연 만만치 않았고 더불어 그 경치도 각별했다. 김응하, 김응해 형제가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기를 만한 곳이었다. 온갖 형상의 바위들이 날카로운 기상을 드러낸 채 한탄강 물결을 굽어보고 있었다. 가장 높은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니 흘러오고, 흘러가는 한탄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어디에서 흘러왔고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답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무지막지한 땡볕이었다. 그 땡볕을 피해 허위허위 숲으로 접어들었는데 앞서 간 권태명 기자가 벌집을 건드렸고 도망간 나는 무수한 풀벌레들의 공격을 받았다(권 기자는 벌에 팔뚝을 한 방 쏘였고 나는 벌레에 여섯 방을 물렸다). 아무나 호연지기를 기르는 게 아니라는 얘기였다!

조선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간다. 파병 이후 신하들과 광해군의 갈등은 깊어지고 결국 1623년 인조반정(광해군의 패륜을 빌미로 서인 일파가 일으킨 정변)을 통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펼치던 광해군은 폐위된다. 뒤이어 즉위한 인조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친명정책을 고집한다. 결국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조선을 뒤흔들었다. 인조는 1637년 청나라 군대를 피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피난 갔다가 잡혀 치욕적인 항복으로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청나라 왕의 신하가 될 것을 약조) 당한다. 그러나 그 굴욕보다 당시 백성들이 겪었을 온갖 고통을 생각하면… 더욱이 강홍립은 정묘호란 때 후금의 앞잡이로 변신하여 조선 땅을 침략했고 휴전협정 때 통역까지 담당했으니….

40세의 일기로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는 조정으로부터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는다. 그는 격변기의 역사 속에서 무신으로 살았고 전쟁터에서 죽었다. 명과 후금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어떤 신념으로 살았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그 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자기 본분을 지켰다. 본분을 지키는 일은 그렇게 쉽고, 그렇게 어렵다. 오늘날 우리가 그를 우러르는 까닭은 오직 거기에 있다.

<끝>

철원=권태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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