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역사속의 강원인물]목숨 내던진 전투로 의로움·충절·용맹함 보여준 조선의 명장

청렴·강직하고 백성에겐 자애로웠던 충무공 김응하 - 오정희 소설가

고려 名將 김방경의 11대손으로

1580년 철원 하갈리서 태어나

14세 때 임진왜란 중 양친 잃고

동생 업고 피난 떠났다 돌아와

기골이 장대하고 언행이 신중

인근에 장사요 호걸로 소문이 나

18세에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기도

25세 되던 1604년 무과에 급제

젊은 나이에 여러 관직 거치면서

청렴·자애로운 성품으로 덕망

'황금을 흙같이… 여색 원수 보듯' 해

후금 공격받은 명의 원군 요청에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광해군 밀명 받은 도원수 강홍립이

전투중지 명하며 투항의 뜻 비추자

“몸만 아끼고 나라를 저버렸다”

크게 꾸짖으며 적진 뛰어들어

뒤에서 날아온 창을 맞고 절명

출병회피 비난했던 사대부들 격분 속

김응하 장군의 결사항전과 전사

명나라에 훌륭한 명분과 의리의 징표

황제가 보답으로 요동백에 봉해

조선 중기의 무신 김응하(應河)는 고려의 명장 김방경(1212~1300)의 11대손으로 1580년(경진년 3월3일)에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 갈원동 하갈리에서 김지사(地四)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의(景義),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4세 때 임진왜란 중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된 김응하는 어린 동생을 업고 피난길을 떠났다. 많은 백성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던 시절이었다. 전란 중에 천애고아가 된 곤고함이 오죽하련만 소년 김응하는 어린 아우를 지성으로 돌보며 씩씩함을 잃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고향인 철원으로 돌아와 사촌형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무예에 뜻을 두어, 어른 한몫의 일꾼으로 농사일을 하는 중에도 밤이면 열심히 병서를 읽었다. 때로 지리산이나 묘향산 등 멀고 큰 산으로 사냥길을 나서곤 했다. 크고 귀한 짐승을 잡아야 돈이 되기도 했을 뿐더러 끓어넘치는 힘을 겨루어 볼 대상이 필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언행이 신중할 뿐더러 기상이 활달호방하여 말술을 들이켜도 흐트러짐이 없기에 인근에 장사요 호걸로 소문이 났다. 18세의 나이에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은 이후 사람들은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장군이라 칭하며 존중하고 어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다.

25세 되는 해인 1604년(선조 37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김응하는 그의 장재(將才)를 알아보고 각별히 아낀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의 추천으로 선전관(宣傳官:선전관청에 소속되어 어가 앞에서 훈도를 하는 임무를 맡은 무관. 무예가 출중하고 용맹스러운 사람을 뽑아 임명하고 끊임없이 무술과 병법을 연마시켰다)이 되었으나 주위의 질시를 받아 이듬해 파직당했다. 1608년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자 그의 비장(裨將:지방장관 및 중국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지방장관이 임의로 임명하였다)으로 기용되었다. 1610년(광해군 2년) 다시 선전관으로 임명되고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에 의해 경원판관(慶源判官)으로 발탁된 후 삼수군수, 북우후(虞侯:조선시대의 무관직. 각도에 배치된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 바로 밑의 벼슬) 등을 역임하였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과 백성에 대한 자애로움으로 덕망을 쌓았다. 사람들은 김응하에 대해 '황금을 흙같이 여기며 여색을 원수 보듯 피한다'라는 인물평을 했다.

경원판관으로 부임할 때 유력한 향반이 지체 높은 양반집의 딸을 천거하며 임지로 데려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김응하는 '나는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인데 그 규수를 다시금 처로 맞이한다면 명분이 문란해질 것이요, 첩으로 삼는다면 그 규수가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라는 말로 정중히 사양하였다.

장년 시절 선조의 국상을 당했을 즈음, 굳이 보는 눈이 없다 해도 스스로 근신하고 주색을 삼가는 태도가 매우 엄격하였다.

김응하가 태어나고 활동했던, 선조와 광해군에 이르는 조선 중기는 나라 안팎으로 격동기요, 극심한 혼란기였다. 삼국시대부터 남쪽 해안지방에 출몰하여 해적질을 하던 왜구의 침입이 한층 극성스럽고 대담해졌다. 내륙 깊숙이까지 파고들어와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더니 삼포왜란과 을묘왜변을 일으켰다. 붕당정치의 폐해로 국론이 분열되고 극도의 문치주의에 흐르며 국방과 군역제도가 허물어지던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백여년간에 걸친 전국시대를 평정, 통일에 성공하여 대륙과 한반도를 정복하려는 야욕을 품게 되었다. 서양의 총포술을 도입하여 개량한 조총으로 군사들을 무장시키고 정탐꾼을 보내어 조선의 산천과 정치적 상황,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세밀히 수집하였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구실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웠다. 즉 명을 치러가는 데 필요한 길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조선이 거절하자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약 20만명의 왜군이 침략해 들어오니 이것이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7년에 걸쳐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국토전역이 전장터가 되었다. 국력은 약해지고 전쟁으로 인한 인명의 살상, 기근과 질병으로 백성들의 삶은 참혹했다. 조선을 도와 함께 전쟁을 치렀던 명나라 역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국력이 쇠하고 황제의 무능과 실정, 환관들의 전횡은 기울어가는 국운에 박차를 가했다. 명나라와 조선이 전란에 시달리는 사이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들은 급속히 힘을 키웠다. 만포진 건너편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주변의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더니 1616년(광해군 8년) 나라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계속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1618년에는 무순을 점령하고 명나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명나라는 요동의 대부분을 빼앗긴 상황에서 큰 병력을 풀어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선천부사로 있던 김응하는 명나라의 원군으로 조방장이 되어 부원수 김경서 휘하에 예속되었다. 명분과 실리를 가늠하며 원병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던 광해군은 이듬해인 1619년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3천명의 병사를 보내면서, 명나라를 도와 전투를 치르되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친선을 도모하며 중립적 입장을 견지할 것 등을 은밀히 지시하였다. 김응하는 도원수 강홍립 예하의 좌영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전세는 불리했다. 명나라 군사는 후금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3월 명나라의 도독 유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부차령에서 싸우다 패전하자 김응하는 3천명의 군사로 진을 치고 진두지휘를 하며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적군이 진을 뚫고 들어오매 지휘관인 우영장 이일원은 달아나고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김응하는 앞장서 포를 쏘고 3,000명의 군사를 독려하며 적을 향해 나아갔다. 구름떼처럼 밀려오는 6만의 적군과 대적하는 3,000명의 아군이란 누가 보아도 중과부적이었으나 전진과 퇴각을 되풀이하는 치열한 전투는 좀체 끝나지 않았다. 김응하는 버드나무 밑에 우뚝 서서 쉴 새없이 적군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두 명의 병사가 기(旗)를 받들고 그의 곁을 지켰다.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뽑아들고 적군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조선군의 시체가 짚단처럼 널린 벌판에서 그를 향해 쏘아대는 화살이 빗발쳤다. 강홍립이 전투중지를 명하며 투항의 뜻으로 통역관을 적진에 보내자 김응하는 '당신의 무리는 몸만 아끼고 나라를 저버렸다'고 크게 꾸짖으며 적진으로 내달았다. 이 날의 전투에서 3천의 조선군사는 전멸하고 김응하 또한 뒤에서 날아온 창을 맞고 절명하였다. 1619년 3월4일, 그의 나이 40세였다. 김응하는 숨이 끊어진 후에도 부러진 칼자루를 끝내 손에서 놓지 않고 노기등등한 눈을 부릅뜨고 있어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다가가지 못했다.

명나라 도독이 패전의 책임으로 목매 자살하고 강홍립과 김경서 이일원 들은 갑옷을 벗고 적에게 항복하였다. 이들의 투항은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의심을 더욱 깊게 하고 동시에 출병회피를 비난했던 조선의 재야 사대부들의 격분을 샀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김응하의 결사항전과 전사는 명나라에 내세울 수 있는 훌륭한 명분과 의리의 징표가 되었다.

그의 아우 김응해는 형이 평소 입던 옷으로 용만강상(압록강)에서 초혼제를 지낸 다음 그 옷을 가지고 돌아와 철원 선영에 장사지냈다. 온 백성이 그의 죽음에 애통해하고 문인들이 다투어 그 의로움과 충절함 용맹함을 기리는 만장을 썼다.

우암 송시열은 포충사묘정비(褒忠詞廟庭碑) 비문에 '…그런데 그 두 소인(강홍립과 김경서)은 대의를 버리고 역리를 따라서 우리 동방예의지국을 온통 금수의 지경에 빠지게 하였으니, 혹 장군의 한 번 죽음이 없었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천하 후세에 변명하겠는가 … 중략 …장군의 죽음은 천하의 대의를 밝히고 천하의 대경(大經)을 세운 것으로서…'라고 썼다.

김응하의 장렬한 죽음과 그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정치적 현상을 통해 조선 중기 사대부사회의 분위기, 이른바 '명청(明淸)교체'라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국제적 전환기에 극히 미묘했던 조선과 명의 관계, 당시 지식인들이 대부분 지녔던 화이관(華夷觀)의 실제적 모습, 그리고 약소국으로서의 입장, 외교문제에 고심했던 조선 조정의 고뇌와 상황을 알 수 있다.

이듬해인 1620년 광해군 12년 명나라 황제 신종은 그의 무훈과 충절에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사당을 용만강상에 건립, 묘정에 비를 세웠으나 1627년(인조 5년) 용만의 사당이 불편한 점이 있다하여 그 비와 함께 철거하였다가 1666년(현종 7년) 철원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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