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율곡에게 길을 묻다]공납으로 고통받는 백성 위해 세금제도 개혁 주창 … 80년 흐른 뒤 고쳐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대동법의 기초 만들어준 율곡

오른쪽 사진은 경기도 파주 자운서원 내 율곡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전시물. 임꺽정의 난이 발발하고 굶어 죽는 백성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조선시대 조세제도를 보여주는 글.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작은 골목길을 지나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대동법 시행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이 비는 대동법 시행에 대한 김육(1580~1658년)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 문제는 늘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다. 있는 사람일수록 더 안 내려고 했고 없는 사람일수록 낼 수 없는 세금 문제로 고통스러워했다.

조선시대 공납제도는 재산 규모와 상관없이 부과하던 세금이었는데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집집마다 거둬들이는 것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조선 건국 초에는 각 지방의 특산물과 호구조사가 잘 이뤄져 있어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중종반정 등을 거치며 훈구세력이 대상인과 결탁하면서 공납은 가진 자들의 배를 채워주는 수단이 됐다. 상인들이 백성이 납부할 공물을 대신 바치고, 수수료와 이자를 보태 원금의 몇 배로 백성들에게 받아내는 방납이 전국적으로 이뤄지면서 그 피해가 커졌다.

명종 때 '임꺽정의 난'이 발생한 것도 관리들이 가혹하게 백성들을 수탈했기 때문이며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에 1569년 율곡이 쌀로 공물을 납부하자는 대공수미법을 건의하게 된 것이다. 율곡은 수운판관이었던 아버지 이원수를 따라 공납으로 들어온 물품을 옮기느라 직접 현지를 다녀봤고 장가를 간 뒤 처가에 머물며 공납으로 인해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율곡 또한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본인도 공납의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조 2년 세금제도의 개혁을 주창했지만 결국 방납으로 이익을 보던 관료와 상인들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겪어보고 경험했던 광해군은 이원익과 한백겸의 의견을 받아들여 선조 41년인 1608년 선혜청을 세우고 경기도에 한해 대동법을 시행했다. 재산이 없어도 부과되던 공물을 농지 소유 면적에 따라 차등 부과하고 지역의 특산물 대신 쌀이나 포로 내게 해 준 대동법에 대해 백성들은 크게 고마워했지만 양반 지주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1569년 율곡이 대공수미법을 건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1651년 김육이 호서대동법을 성립하기까지 조세제도를 고치는 데 80여년이 걸렸다. 그리고 18세기 숙종대에 이르서서야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대동법이 시행됐다.

이정철이 쓴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에 조정 동료들뿐 아니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조문한 예가 두 사람 나온다. 한 사람은 율곡 이이, 또 한 사람은 김육이다. 이이는 공물변통을 체계적으로 주장한 사람이고, 김육은 공물변통을 실제로 성립시킨 사람이다.

백성을 생각하는 뚝심 있는 선비가 없었다면 대동법은 있는 자의 저항에 막혀 사라졌을지 모른다. 안민을 꿈꿨던 율곡 이이의 정치철학이 만들어 낸 개혁이었고 그 마음이 백성들에게도 전해져 율곡의 죽음을 마음 깊이 슬퍼했던 것이리라.

강릉=조상원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피플 & 피플

이코노미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