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율곡에게 길을 묻다] 성찰은 공부와 수양의 핵심…이 방법을 토대로 스스로 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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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율곡의 학문

◇경기 파주 자운서원. ◇이승종 연세대 철학과 교수

'주자학' 수용하되 리·기 아우르는 자신만의 해석 일궈내

율곡은 리기론을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는 명제로 정리

현대 분석형이상학·과학철학에도 시사하는 바 적지 않아

보편적 사유를 자신의 시대에 운용 … '내성외왕'의 도 실천

율곡을 그가 살았던 역사적, 시대적, 사회 문화적 지평의 겹주름들에 주목해 원근법을 동원해 초점을 맞춰 보면 다음과 같다. 소범위로 좁혀 보자면 그는 선조의 시대에 속하고, 중범위로 넓혀 보자면 주자학을 근간으로 설립된 조선 왕조의 중반기를 살았으며, 대범위로 확장해 보자면 유불선(儒佛仙) 3교가 만개하다 유교로 수렴되는 과정을 거친 우리 역사의 후반부에 놓이게 된다. 각 주름의 근본 전제가 되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대범위), 주자학(중범위), 선조 시대의 상황(소범위)이다. 율곡은 이 세 겹주름이 포개진 위상 공간 안쪽으로 자리매김된다.

신채호는 1135년 서경(西京) 전쟁에서 김부식이 묘청을 꺾고 승리한 사건을 우리 역사상 1,000년 이래 최대 사건으로 꼽는다. 우리 역사는 화랑가의 독립사상과 유가의 사대주의로 나뉘어 왔는데, 불교도로서 화랑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묘청이 패망함으로써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대주의파의 대표 김부식이 역사가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부식의 승리와 묘청의 패배는 개인의 승패나 이념의 승패를 넘어선다. 김부식의 승리로 그의 사관과 배치되는 이전의 우리 역사서는 모두 사라져 버리는 운명을 겪게 되고, 철저히 유가 사대주의의 관점에서 서술한 그의 '삼국사기'가 우리 역사의 가장 오래된 카논(Canon)의 자리를 꿰찬 것이다.

유가의 학문인 주자학을 수입해 연찬한 정몽주는 “꿈속에서라도 주(周)나라를 본다”는 뜻에서 이름을 몽주(夢周)라 지었다. 그의 꿈은 한반도가 중국 고대의 이상 국가인 주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조선을 개국한 정도전의 이름은 도(道)를 전한다(傳)는 뜻이다. 여기서 도란 '주희의 도'를 의미하는데 그의 꿈은 조선을 주자학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율곡이 저러한 기획하에 만들어진 조선에서 태어나 활동한 학자요 정치가라는 사실은 그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이룬다.

중국 송(宋)대의 철학자 주희는 사람됨의 문제를 이(理)에 의해 해명했다. 그는 이(理)를 태극과 동의어로서 우주의 궁극적인 통합 원리로 부각시키면서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에 비유했다. 리(理)를 상징하는 달빛을 담아내는 강물은 기(氣)를 상징한다. 요컨대 기는 리를 담는 형기(刑器)요, 도구다.

조선으로 건너온 주자학은 서경덕의 주기론(主氣論), 퇴계의 주리론(主理論) 등으로 분화됐다. 각각 유물론(唯物)과 유심론(唯心論)에 가까운 이들의 철학은 이(理)와 기(氣)의 조화를 지향하는 주자학과는 거리가 있었다. 율곡은 주자학을 수용하되 주기론(主氣論)이나 주리론(主理論)과 같은 반쪽짜리 해석이 아니라, 리와 기를 아우르는 자신만의 해석을 일궈냈다.

율곡은 리기론을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는 명제로 정리했다. 사태는 리와 기로 이뤄져 있다. 발현하는 기에 리가 타는 방식으로 한데 묶인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기발이승은 개별적 기에 대한 보편적 리의 개념화 작용을 지칭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사태를 지향하는 인간의 마음도 리와 기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태이다. 마음도 발현한 기에 리가 타는 방식으로 한데 묶여진 구조로 이뤄져 있다. 우리의 개별적이고 사적인 마음에 보편적 리가 개입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라는 사태 역시 탈바꿈하게 된다.

기발이승과 함께 율곡의 철학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명제는 이통기국(理通氣局)이다. 기발이승이 발현하는 특정한 기가 그것에 타는 보편의 리에 의해 묶인다는 명제라면, 이통기국은 거꾸로 보편의 리가 특정한 기에 의해 국소화(局所化)됨으로써 실현된다는 명제다.

리와 기는 그리스철학의 형상과 질료와 닮았다. 그리고 형상과 질료의 개념은 서양철학사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현재까지 그 논의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반면 리기론은 동양에서조차 이제는 절맥되다시피 한 상태다. 동양이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양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함에 따라 동양의 학문은 동양인들에게조차 신뢰를 잃게 된 것이다. 동양의 전통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시대착오라면, 전통학문을 송두리째 버리거나 망각하는 것은 조상들이 전해준 소중한 지적 자산을 부정하거나 방기하는 어리석은 처사다. 전통학문은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 할 만한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할만한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오늘에 재구성해본 율곡의 학문은 현대의 분석형이상학이나 과학철학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세계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지역으로 행동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우리 시대의 모토는 현대를 사는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 차원의 생각과 국지적 차원의 행동을 동시에 구현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보편적 리와 개별적 기의 관계를 창의적으로 밝혀낸 율곡으로부터 우리는 시대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 그는 성찰을 공부와 수양의 핵심으로 보았다. 성찰(省察)이란 자신을 반성(反省)하고 외부의 사태를 두루 통찰(通察)함을 뜻한다. 그는 이 방법을 토대로 스스로를 연마하여 가다듬어낸 보편적 사유를 자신의 시대에 운용함으로써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를 실천했다.

우리는 시공의 제약을 초월해 세계를 하나로 잇는 인터넷이라는 21세기의 인트라망을 통해 소통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리와 기에 견줄 때 율곡이 논했던 기발이승(氣發理乘)과 이통기국(理通氣局)은 관념이 아닌 현실이다. 컴퓨터를 켜는 순간 기발이승이 실현되며,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이통기국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율곡을 계승하고 업그레이드하는 과제는 우리의 몫이다.

이승종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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