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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율곡에게 길을 묻다]나라를 다스리는 힘의 근본 '국민의 동의'에서 찾은 율곡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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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천재, 백성을 생각한 이이

◇경기 파주시에 있는 자운서원 내 율곡의 묘소.

강릉에서 나고 자라면서 율곡 이이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우고 컸다. 위대한 성현, 구도장원공, 천재, 경세가 등 율곡 선생은 일반인이 넘을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한 율곡이었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게 되면서 삶이 궁금해졌다.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가장 아꼈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 길에 입고 갈 수의 한 벌조차 가지지 못했다.

아니 갖지 않았다. 온 가족이 함께 살기를 바랐지만 늘 곤궁했기에 대장간에서 호미 등 농기구를 만들어 팔기까지 했다.

또 구도장원공으로 알려졌지만 실패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율곡은 23세가 되던 봄 강릉 외할머니께 가던 길에 퇴계를 만났다. 그리고 퇴계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식을 전했는데 그해 과거에 낙제해 풀이 죽은 상태로 퇴계에게 조언을 구했다.

1558년 명종 13년 23세 때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편지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로 답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젊은 나이에 과거에 오르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라고 하였으니, 자네가 이번 과거에 실패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자네를 크게 성취시키려는 까닭인 것 같으니 자네는 아무쪼록 힘을 쓰게나.”(퇴계전서 권13, 서 중에서)

율곡은 퇴계를 만난 그해 겨울 문화 별시 초시에 그 유명한 천도책으로 장원급제를 했다. 그러나 율곡은 문화 별시의 최종 시험에 급제하지 못했다.

율곡이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에 입학할 때도 당시 성균관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율곡이 스님이 되기 위해 금강산에 들어간 것이 문제가 됐다.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율곡을 받아들일 수 없다 했고, 우여곡절 끝에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너무나 똑똑했기에 그저 과거를 보기만 하면 장원을 했고 그렇게 엘리트 코스로 탄탄대로를 달린 줄만 알았던 율곡의 삶을 들여다보며 실패 속에 좌절하지 않고 정진하고 가다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모습을 봤다.

그렇게 나아간 벼슬길에서 율곡은 정치의 기준을 백성에 뒀다. 시폐 7조책에서는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기준을 나라와 백성의 편안함과 이익에 뒀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힘의 근본을 백성의 동의에서 찾았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생민(生民)을 위해 세금을 거두는 방식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나라의 근간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율곡의 현실적 철학은 대동법의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율곡 사후 436년이 흘렀다. 율곡이 살았던 그 시대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다를 바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된 '율곡에게 길을 묻다' 시리즈는 진정한 생민(生民), 안민(安民)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 과거의 역사 속에서 현재의 답을 찾는 여정이었다.

글=조상원기자·사진=권태명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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