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율곡에게 길을 묻다]민중의 삶 안정시키지 않고는 구현 불가능한 도덕적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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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完)도덕공동체로 가는 길

◇강릉 오죽헌의 몽룡실.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성리학 도덕적 개인들의 공동체 지향

일종의 세계 시민주의적 자세로 배려

리기론적 관점서 '사람다움'을 추구

율곡 '기질도 수양 통해 변화 가능'

현실에 초점 두면서 이상에 접근 역점

'민생보다 교화 앞서는 것 잘못' 지적

성리학(性理學)은 글자 그대로 ‘인간 본성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목적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여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당위적 신념이다. 성리학의 이런 신념은 당연히 도덕적 개인들이 더불어 사는 도덕공동체를 지향한다. 주희(朱熹)의 선배 세대 가운데 한 사람인 장재(張載)는 일찍이 성리학의 이와 같은 원대한 꿈을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도를 세우며, 지나간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太平)을 연다.”라고 천명한 바 있다. 장재가 말하는 ‘태평’을 유학에서 많이 회자되는 용어로 바꾸면 ‘대동(大同)’이다. 사서오경의 하나인 『예기』에 처음 등장하는 대동사회는 공공성이 완전히 구현되어 구성원들이 일종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적 자세로 타인과 공감하고 배려하는 도덕공동체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대동사회와 같은 도덕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에 대해 유학은 시대와 학파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논어』에 나오는 ‘수기(修己)-안인(安人)’을 절대적인 방법론으로 제시한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개인의 도덕적 수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실천의 병행이다. “큰 배움의 길[大學之道]은 자신의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친애하는 데 있으며, 그렇게 하여 모두 지극한 선의 경지에 머무는 데 있다.”고 하는 『대학』의 저 유명한 구절은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부연한 것이다.

 

성리학적 도덕공동체에 대한 율곡의 생각도 이 얼개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도 기본적으로 주희의 사상을 계승한 성리학자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 이상을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 하는 방법론의 문제로 넘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상사회론과 관련된 모든 논의에서 관건은 그것이 청사진의 차원을 넘어 어떻게 ‘현실’과 접목될 수 있게 하느냐는 하는 것이다. 내용이 아무리 장밋빛일지라도 현실과 겉도는 이상사회론은 공허하다. 바로 이 부분에서 율곡은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상이 구현되는 터전인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성리학의 중심이론은 리기론(理氣論)이다. 리는 일차적으로 어떤 사물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일 수 있게 하는 근거이고, 기는 그에 따라 사물을 생성시키는 힘이자 질료이다. 사람이 개나 소나무가 아닌 이유는 개와 소나무를 생성시키는 것과는 다른 구조적 원리가 사람이라는 종(種)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루는 기는 이 원리에 따라 결합되므로 개나 소나무가 아니라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다움’의 본질은 자명해진다. 개나 소나무의 생성원리가 아니라 사람의 생성원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곧 사람다움의 길이다. 이로부터 리의 또 하나의 성격이 드러난다. 리는 어떤 사물이 그것일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론적 원리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그것다울 수 있는 규범적 원리라는 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성리학은 사람의 경우 이 규범적 원리의 핵은 인의예지(仁義禮智)로 대표되는 도덕성이라고 파악한다.

 

이런 구도 속에서 우리는 ‘사람다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이것은 기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이 어떻게 인의예지와 같은 도덕을 구현하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퇴계는 우리에게는 인의예지의 단초를 이루는 사단(四端)이라는 도덕감정이 원초적으로 내재해 있고, 따라서 이것을 잘 보존하여 일상 속에서 온전하게 드러나게 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율곡은 우리에게 사단과 같은 도덕감정이 원래부터 따로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대신, 있는 것은 칠정(七情)으로 대표되는 희노애락의 일반감정뿐이며, 그 일반감정을 일상 속에서 잘 제어하여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게 하면 그것이 바로 도덕감정이라고 본다. 요컨대, 퇴계는 우리의 일반감정과 도덕감정을 구분하려 하고, 율곡은 도덕감정은 일반감정의 특수한 형태라고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의 단초인 측은지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애틋해 하는 슬픔의 감정이 상황에 적합하게 표현되면 그것이 곧 측은지심이라는 주장이다. 도덕공동체를 견인하는 두 축 가운데 하나인 개인의 도덕적 수양 문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퇴계가 도덕적 본성이라는 이상의 순수성과 독립성을 강조한다면, 율곡은 희노애락하는 삶의 현실에 초점을 두면서 그것을 변화시켜 이상으로 접근시켜 나가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다. 율곡이 타고난 기질도 수양을 통해 바꿀 수 있다는 적극적인 주장으로까지 나아가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상’의 구현은 명분이나 구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율곡의 생각은 도덕공동체를 견인하는 또 하나의 축인 사회적 실천의 영역에서도 잘 드러난다. 단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향약(鄕約)에 대한 태도이다. 향약은 성리학적인 도덕공동체의 구현에서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매개하는 대표적인 실천 프로그램이다. 율곡 또한 파주향약과 청주 서원향약, 해주향약 등의 시행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만큼 이에 적극적이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율곡은 당시 향약의 전면적인 시행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 민생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황에서 교화를 서두르는 것은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지론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율곡은 향약처럼 덕으로 교화하는 일이 음식으로 치면 고량진미인 것은 분명하지만 소화기관이 극도로 손상되어 미음도 내려가지 않는 상태라면 그것이 아무리 좋더라도 먹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율곡의 많은 개혁책들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구상된 것이다. ‘도덕적 인간’, ‘도덕적 사회’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당위라 하더라도 먼저 민중의 삶을 안정시키지 않고는 구현될 수 없다. 민중은 언제나 그 길을 함께 걸어야 할 궁극적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450여 년 전 성리학적인 도덕공동체를 추구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 조건들을 살피는 데에서부터 출발했던 율곡이 툭하면 이념을 앞세우는 우리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다.

박원재 율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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