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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만해축전 전국고교생 백일장 수상작]산문 문체부장관상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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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효민(고양일고 2년)

엄마는 흰옷을 입는 날이면 꼭 무언가를 묻혀오곤 했다. 김칫국물, 커피 얼룩, 어떤 날엔 비둘기 똥을 맞거나 과속하는 차량의 빗물 테러로 옷이 흠뻑 젖어 올 때도 있었다. 이건 ‘꼭 이럴 때만’ 법칙과도 같았다. 꼭 흰옷을 입고 갈 때만 옷에 뭔가 묻히고 오니 말이다. 엄마는 이 법칙을 깨우치기 위해, 흰옷을 입고 간 날에는 커피를 포기하고 물을, 김치를 외면한 채 피클을 먹어도 봤지만, 역시나 모두 헛수고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짬밥이 찬 지금은 꼭 이럴 때만 법칙에도 공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식은 뭐 별거 없었다. 옷을 세탁기 안에 넣는 것. 이게 바로 그 공식이었다. 흰옷에 얼룩을 묻히지 않고 귀가하기란, 엄마에겐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과 우린 타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공식이 바로 세탁기였다.

“딸래미, 엄마 왔어.”

엄마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엄마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엄마는 허물 벗듯 현관부터 방까지 옷을 쭉 늘어놓았다. 나는 옷을 하나하나 주워들었다. 엄마는 이미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져 있었다. 난 불을 끄고 방문을 살며시 닫았다. 그리고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로 향했다. 난 엄마의 옷을 세탁기 안에 넣고 적정량의 세제를 부었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세탁기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옷 사이사이로 거품이 일어났다. 옷에 벤 엄마의 땀이 거품과 비벼지고 있었다. 세탁기는 오늘만치 엄마의 땀을 전부 씻어주었다. 세탁기 안에서 꺼낸 엄마의 옷은 마치 새 옷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나는 그런 세탁기가 더 빨리, 더 깨끗이 옷을 빨아주길 바라며 두꺼운 몸통을 툭툭 토닥였다.

엄마는 야간까지 마트에서 캐셔로 일했다. 엄마는 교통사고로 먼저 아빠를 떠나보낸 후부터 마트 일도 야간 정리 근무까지 일을 늘려가며 전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갔다. 아무래도 혼자 이 모든 걸 짊어져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겠지.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씻지도 못한 채, 축축해진 옷을 벗고 바로 침대 위로 향했다. 그럼 나는 내일 엄마가 입고 갈 수 있도록 옷을 세탁기에 넣어 빨았다. 늦은 저녁까지 엄마를 기다려야 하기에 피곤할 때도 있지만, 엄마의 고생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를 위해서 이것밖에 해줄 수 없어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난 옷을 정말 깨끗이 빨았다. 물론 세탁기가 다 하는 것이긴 하지만. 특히 흰옷은 더욱 그랬다. 다음 날 엄마가 빳빳해진 옷을 입고 기분 좋게 집을 나설 수 있도록.

엄마는 오늘 흰옷을 입고 나갔다. 오늘 아침 빨래 건조대에 올려놓았던 흰옷이 없어진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나는 오늘은 또 어떤 걸 묻혀올까 생각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하지만 저녁 11시가 지났음에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엄마가 오늘은 좀 늦네. 엄마를 데리러 갈까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현관문 밖에서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현관문 언저리에서 머뭇거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는 평소보다 더 지친 목소리였다. 엄마 왔어. 어두웠던 현관문에 센서등이 켜지며 엄마를 밝게 비췄다. 그러자 벌겋게 물든 엄마의 흰옷이 보였다. 아니, 빨간 옷이.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당황해 그저 엄마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엄마는 터덜터덜 옷을 벗으며 나를 지나쳐 방으로 향했다. 그리곤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들었다. 그러자 옷에서 빨간 국물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시큼한 냄새가 났다. 김칫국물이었다. 대체 옷에 웬 김칫국물이. 나는 엄마의 방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방문 안에서 마치 울음을 참는 듯 끅끅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문을 열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그냥 엄마의 옷을 갖고 세탁기로 향했다. 세탁기에 옷을 넣고 표백제를 부어 세탁기를 돌렸다. 저거, 엄마가 잘 입고 다니던 옷이었는데. 난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 앞에 쪼그려 앉아 흰옷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거품이 빨간 김칫국물에 벌겋게 변해가고 있었다. 문득, 엄마를 세탁기 안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저 세탁기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오늘의 얼룩들을 전부 지워낼 수 있지 않을까. 완전히 지울 순 없어도 조금은 옅어질 수 있진 않을까.

세탁기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곧 세탁기는 거품을 빼낸 후 물을 넣고 헹구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탈수에 들어가 옷에 있는 물기를 쫙 빼내겠지. 그럼 나는 향긋한 섬유유연제를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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