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무심한 풍경이 주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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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서숙희 작가, 오는 26일까지 춘천 개나리미술관에서 ‘사물의 기록-살구나무집, 산, 집, 그릇’

◇서숙희 作 산

선 너머에 산이 보인다. 선, 산 모음 하나의 차이일 뿐인데 묘하게 다른 인상을 준다. 무수히 많은 선의 움직임이 우리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을 법한 무심한 풍경이 생채기를 어루만진다. 선으로부터 생채기를 얻고, 산이 생채기를 치유한다. 작품 속에는 선과 산이 있다. 우리는 그저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선과 산 그 미묘한 경계 속에서 작품을 바라볼 뿐이다.

서숙희 작가는 오는 26일까지 춘천 개나리미술관에서 ‘사물의 기록-살구나무집, 산, 집, 그릇’을 주제로 신작 30여 점을 선보인다. 그의 작품은 시작과 끝이 없다. 그래서 시작이 끝이 될 수도 있고, 끝이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는 그저 반복적으로 작품을 칠하고, 지우고, 긁고, 또 칠하는 시간이 쌓일 뿐이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하나의 노동이다. 따라서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색을 칠하고 형태를 완성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색을 덜어내고 화면을 비워가는 방식을 취한다.

◇서숙희 作 대나무

그의 작품은 단순 명료하게 설명하면 비움의 미학이다. 시간의 깊이가 소박하게 스며든 지점을 찾아갈 때 그림에서 손을 놓기 때문이다. ‘서숙희 색조’라 불릴만한 푸르스름한 깊이감을 지닌 청록빛의 색은 사물의 외곽과 공간의 영역을 중첩하는 오묘한 역할을 한다. 마치 배경 속에 사물이 배어들어 있는 것 같다. 계속해서 경계를 넘나드는 그답다. 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부분 대나무로 둘러 싸인 집, 먹고 자고 씻고 치우는 유리잔과 그릇들이다. 작가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기억 속에 흐릿한 흔적처럼 작품을 드러낸다. 사물이 지닌 사실성을 넘어 시간성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실적이며, 완전한 재현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잘 안다.

서숙희 작가는 “이맘때면 매년 대나무를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접는다. 아무리 그려도 실제의 대나무만 못하기 때문”이라며 “올해도 작년에 그리다 접어둔 대나무 그림을 꺼냈다”고 말했다. 이처럼 완전한 사물을 영원히 완성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그려야만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숙제이자 숙명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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