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언중언]단종애사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1929년)’는 1930년대 역사소설의 유행을 주도한 베스트셀러였다. 이 소설을 각색해 만든 전창근 감독의 영화 ‘단종애사(1956년)’는 당시 삼천만 환을 들여 만든 대표적인 궁중사극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사극의 전성기라 불리는 1960년대에 제작된 이규웅 감독의 ‘단종애사(1963년)’도 인기몰이를 했다. 역사소설이 소설로서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원본으로 한 사극영화나 역사드라마로 각색되어 광범위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광수의 ‘단종애사’가 발표되던 시기를 전후해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은 이러한 국민적 호응을 지면에 적극 끌어들였다. 정사적(正史的) 역사물이 신문의 문예란에 주요한 기사 항목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이때였으며 신문사의 창간 이념을 선전하는 모토 이상의 상업성을 인정받았다. 급기야 신문들은 문예란 이외의 지면에 역사소설란을 고정 배치해 본격적인 역사소설의 유행을 불러오게 됐다. 춘원의 ‘단종애사’는 당당히 그 첫자리를 차지했다. ▼어린 단종과 야망가 수양 진영 간의 대립구도로 그린 ‘단종애사’는 선악 구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정인지 한명회 등 수양 추종세력이 펼치는 악행의 활약상은 잔혹하게 처형되는 사육신과 대비되며 주된 흥미요소였다. 신분 계층 지역을 막론하고 많은 독자를 거느렸다. 수천 통의 편지도 받았다. 민족 역사에 대한 자각의 기회를 제공하고 암울한 사회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는 매개가 된 점이 이 작품에 열광하도록 했다. ▼‘단종애사’가 구현하는 충(忠) 의(義)라는 전통적 대의명분은 1920년대 말 민족주의 운동이 처해있던 절실한 상황을 반영했다. 이광수가 친일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독자들은 소설 속에서 민족적 동질감을 회복하는 기회를 얻었다. 충의의 고귀함과 그 정신이 곧 민족성임을 자각하게 됐다. 단종애사가 서린 영월 낙화암(落花巖)의 위치를 알려주는 암각 글씨가 확인됐다.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단종의 고혼을 달래게 된다. 장기영논설위원·kyjang@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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