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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신년특집 신춘문예 당선작 단편소설 부문] 이윤경 '그 여자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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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조남원기자

여자는 책을 읽고 있었다.

집에서 책을 읽을 때면 언제든 여자의 자세는 제멋대로였는데 제일 좋아하는 포즈는 책상에 두 다리를 올리고 의자에 거의 눕듯이 기대어 책을 읽는 거였다. 그게 제일 몸에 힘을 안 주고 느슨하게 있을 수 있는 자세 같았다. 하지만 지금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여자의 모습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다소곳하고 정갈하기 그지없다. 여자는 집에서 그런 자세로 책을 읽는 게 척추 건강에 안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도서관에 와서 읽을 때의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정갈해지는 자신의 모습도 좋았다. 사실 여자는 책을 읽기보다도 책을 만지고 냄새 맡는 데 대체적인 시간을 다 보내곤 했는데 마치 받아들여진 적 없는 자기 일부를 내던지는 필사의 행위 같았다. 그러니까 사실 여자는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책과 뒤엉켜 타액을 나누며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책의 냄새를 좋아하고 책을 만지기를 좋아하고 책 속에 얼굴을 파묻고 부비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유독 새 책을 좋아했다. 책 상태가 양호하다 못해 손때를 한 번도 안 탄 듯한 새 책들은 펼쳐보면 흰누런 속지가 퍼렇게 광이 난다. 모서리는 마치 수백 개의 잘 벼른 칼을 겹쳐놓은 모양새로 절도 있는 긴장을 이루고 있다. 새 책 사랑꾼인 여자는 도서관에서 그런 책을 발견하면 아무도 발 디디지 않은 순백의 땅에 들어선 초인처럼 뿌듯하게, 갓 태어난 나무를 대하듯 조심스레, 그를 품에 안았다.

어떤 남자는 여자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데이트 코스를 헌책방으로 잡기도 했는데 당연히도 그날 여자는 심드렁했다. 헌책은 여자에게 흥미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자는 새 책을 좋아했고 이제 막 제본되어 따끈따끈하게 마른 잉크향을 좋아했다. 젊고 팔팔한 새 책이랑 씨름하는 게 즐거웠다. 헌책은 왠지 씨름하는 맛이 나지 않았다. 늙고 기운없어 보이는 게 꼬질꼬질하기까지 하면 손도 대기 싫었다. 가끔 어쩔 수 없이 도서관에서 그런 책을 빌려다 놓으면 마치 왕의 승은을 입지 못하는 뒷방 후궁처럼 이 주 동안 여자의 책장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가 마지못해 반납일에 겨우 여자의 손에 낼름 낚여채지곤 하는 거였다. 실제로 여자는 제 방 책장 앞에 호기롭게 서서 자, 오늘은 누구를 품에 안아 볼까, 하면서 한껏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여자에게 책은 애인 같기도 하고 애완동물 같기도 한 거였다. 마음이 힘든 날에 여자는 파자마를 입고 침대 위에 누워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과 함께 널부러져서 아무렇게나 마구 마구 책장을 펼치고 넘기곤 하였는데 여자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일종의 '책 파티'였다. 그동안 사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채 펼치지 못했던 책들을 그 김에 한 문장이라도 더 읽어볼 수 있다는 경제성과 효율성뿐만 아니라 책을 꼭 정좌하고 앉아서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빠짐없이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강박증에서도 자유로워지면서 타성에 젖은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놓여나는 경험을 하는 게 좋았다. 숨겨둔 애인도 아니고 극성맞은 동성 친구도 아닌 한낱 책 따위에게 일 순위를 밀리는 여자의 연인들은 그래서 하나같이 여자의 책들을 못마땅해 하고 특히 책 파티라면 지레 손사래를 쳤다. 결국 그것 때문에 마음이 틀어져서 여자에게 이별을 선고한 남자들도 있었다.

여자는 양장본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그것은 힘을 쥐어 잡아도 구부러지지 않아 마치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남자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체적으로 양장본의 책들은 크기가 작고 낱장을 펼쳐보면 마치 어린애들 동화책처럼 본문의 문장들이 간격이 너무 넓어서 여자로 하여금 글줄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정신 산란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양장본을 빌려다 놓고는 한 장도 제대로 못 읽고 도로 고스란히 반납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 여자가 도서관에서 읽고 있는 책은 양장본이다. 책 크기가 작고 얇았고 문장의 간격도 커서 그야말로 여자가 싫어하는 종류의 책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여자는 그 책을 끈질기게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양장본의 저자는 마흔두 살에 자살을 했는데 그 책은 자살 직전에 쓴 유작이라고 했다. 그 사연을 여자는 그 작가를 소개한 다른 작가의 책을 통해 알았다. 난해한 소설로 유명한 그 작가는 소수의 고정된 팬 층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여자도 그 몇 안 되는 팬들 중 하나일 것이었다. 능청스럽게도 그는 어느 글에서 마치 장난꾸러기처럼 양장본의 작가가 자살한 방법을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런 진지하지 않은 모습이 여자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다 해도 그 자살한 작가의 유작인 양장본의 책은 양장본인 것 외에도 읽기에 여러모로 하자가 많았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서사 구조에서도 기인했다. 이야기랄 게 따로 없이 모든 문장이 따로따로 노는, 한마디로 이야기가 없는 소설이었고, 그래서 여자는 읽으면서 몇 번이나 커버로 돌아가 거기 쓰여진 '장편소설'이라는 네 글자를 확인했다. 여자가 볼 때 그 소설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을 몇백 개로 모은 소설집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문장이 뜬금없었고 아무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냥 작가 자신이 자기에 대해 생전에 하고 싶었던 말을 일일이 열거해 놓은 것 같았다. 다만 중간중간의 문장들이 얼마 안 있어 벌어진 그의 자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 불길했다. 여자 자신도 왜 그 책을 읽고 있는지 몰랐지만 굳이 이유를 든다면 그 책이 국내에 번역이 된 지 이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그 책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여자가 어느 날 도서관에서 그 책을 찾아봤을 때는 이 년째 아무도 만지지 않은 깨끗한 새 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소설이란 것 자체가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아무 연관없는 문장을 일일이 나열해놓은 걸 보고 있으니 더더욱 이건 거짓말의 군집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자살 방식을 궁금해한 작가 역시도 글에서 항상 하나마나인 아리송한 이야기들을 하기 때문에 요즘 여자는 두 작가의 글들 속에서 자신이 점점 거짓말쟁이들의 세계에 물들어간다 싶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자는 그들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을 읽으며 자신 또한 기가 막히게 완벽한 거짓말을 해보거나 아니면 거짓말 같은 일을 벌여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가 알기로 여자 자신은 무기력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거짓말이든 거짓말같은 일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쩐지 여자는 자꾸 그런 거짓말쟁이들의 글이 읽고 싶어서 재미도 없고 지루한, 책이라 망정이지 사람으로 따지면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그 작고 하얀 양장본의 책을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마치 거짓말을 전문적으로 잘 하기 위한 유료 강습이라도 듣는 사람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주로 여자를 향해 열정적이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투로 인식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 여자가 아는 그 자신은 무기력하고 될 수 있는 한 지금보다 더욱더 가열하게 무기력해지고 싶은 인간이었다. 어쩌면 지금껏 남자들이 여자를 떠나간 이유도 책은 핑계일 뿐 여자의 대책없는 무기력증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마도 여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 열정적이지 않은 인간이 열정적이고 심지어 믿음직한 이미지로 보인다는 건 여자가 은연중에 자꾸 남들 앞에서 자기를 그런 모습으로 어필한다는 거였다. 그게 싫었던 여자는 그래서 일상 중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최대한 생산성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져 견딜 수 없었고 앞으로는 그 무엇도 하고 살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말이 안 되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라는 걸 알았기에 그 다짐의 끝은 착잡했다. 그렇다고 죽어버리기엔, 당연하게도 그건 너무 극심한 고통을 동반할 것 같았고, 그래서 죽지 못해서라도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아는 여자와 여자가 아는, 아마도 실제에 더 가까운 여자 사이의 괴리가 지겹고 신물이 날 때 즈음 여자는 집시처럼 도서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자가 낯선 곳을 여행할 때마다 계획에 없던 그곳 현지의 도서관들을 둘러보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친구들이 유럽과 동남아 여행에서 돌아와 열쇠고리나 자그마한 기념품들을 선물해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나도 한번 가봐야 되는데, 라고 말해도 사실 여자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것은 어쩌다가 한 번씩 코에 바람이나 넣자 하여 훌쩍 떠난 국내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실컷 사찰을 돌아다니고 그 지역을 빛낸 위인의 생가나 기념관들을 들러도 정작 그거보다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건, 우연히 그 옆에 있는 도서관이 눈에 띄어 그곳에 들어가서 책을 읽은 기억들이었다. 왜 매번 여자가 가는 곳에는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는지 몰랐으나 어쨌든 여자는 그때마다 굳이 도서관 안을 들어가 보았고 거기서 한두 권의 책을 대충 만지고 푸득거려 보다가 나왔다. 강원도 여행 때는 우연히 들른 곳이 그곳 일대에서 박사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하여 '박사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서면'이라는 지명의 그 한적한 곳에도 도서관이 있었고 거기서 우연히 꺼내 읽은 책을 통해 여자는 평소 고민하던 신체적 통증을 해결할 단서를 발견하기도 했다. 통영에서든 여수에서든 언제나 여자 눈에는 도서관이 밟혔다. 대단한 책도 아니었고 대단한 도서관도 아니었지만 여자는 매번 여행지에서 도서관에 발을 들일 때마다 마치 애초부터 목적지는 도서관이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여자가 가고싶은 곳은 어쩌면 세상 천지에 도서관밖에 없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갑작스레 시작된 도서관 여정은 어쩌면 여자가 더욱더 그 자신이 되려는 필사의 보고이기도 했다. 더 성실해질 것도, 더 다른 무언가를 노력할 것도 없이, 여자는 지금보다 더더욱 여자 자신이 되고 싶었는데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여자 본인과 잘 어울렸다. 검색을 해보니 여자가 사는 도시에는 약 사십여 개의 도서관이 있었다. 여자는 틈나는 대로 한 군데씩 소풍가는 기분으로 그곳들을 들러서 지금은 절반 정도를 돈 상태였다.

도서관들은 저마다 얼굴들이 달랐다. 어떤 도서관은 깨끗한 새 책들이 고르게 진열되어 있었고 어떤 도서관은 책인지 누더긴지 싶을 정도로 누덕누덕한, 왠지 만졌다가는 그 즉시로 손에 세균이 우르르 몰려들까봐 겁이 날 정도로 더럽고 지저분한 책들 뿐이었다. 그러면 여자는 그 지역의 사람들이 유독 독서를 많이 하는 걸까를 순간 가늠해보지만 어차피 그건 여자와 상관없는 일이니 한시라도 바삐 깨끗한 책들이 많은 도서관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떤 도서관은 규모가 작고 책의 양도 적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하고 어떤 도서관은 도착하는 순간부터 기분이 나빴다. 그 이유는 대체적으로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상주해 있느냐에 따라 달랐는데 단지 시끄럽거나 여자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아도 알 수 없이 자꾸만 거기 있는 게 마뜩찮고 불안해지는 곳이 있었다. 그런 곳에는 대개 거기 상주하는 사람들이 성별을 막론하고 연령대가 좀 높았고 뭔지는 몰라도 도서관이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 조직으로 기능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어쨌든 그 느낌은 아주 쏜살같이 순간적인 것이라 여자가 입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어깨와 호흡으로 체감되곤 하여 그 느낌이 들면 공연히 마음과 씨름할 생각은 애초에 접고 빨리 가져온 책을 반납하거나 빌리려 한 책을 대출해서 볼일만 딱 보고 지체없이 그 건물을 뜨는 게 도리가 되었다. 반면, 아기 엄마들이나 어린 학생들이 주로 들르는 도서관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호흡이 트이고 거리낌이 없었다. 아기들은 옹알이를 하고 엄마들은 혹여 주변에 조용히 독서하는 시민들에게 방해라도 될까봐서 쉴틈없이 그들을 어르고 반응한다. 하지만 여자에게 오히려 그런 주변은 문제가 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 곁에 있으면 여자까지 생기를 얻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내부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혼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중장년 남자 사서들이 목석같은 얼굴로 마지못해서 데스크에 앉아있는 곳보다는 어린 아기와 젊은 어머니가 서로 귀엽게 실랑이하고 있는 곳이 경험상 훨씬 있기에 편했다. 대체적으로 그런 도서관들은 규모가 작고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 도서관들이었고 당연히 책들도 헌책보다는 새 책들이 많았다.

사실은 그래서 여자의 구미대로라면 어차피 여자가 즐겨 찾을 곳은 몇 군데 정해져 있었는데 오늘 여자가 책을 읽고 있는 곳은 그 중 가장 여자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남은 도서관들을 계속 더 탐방할 필요가 있는지 여자는 이 여정을 이쯤에서 그만 둘까도 잠시 고심해 봤지만 한편으로는 그 끝을 찍어보고 싶었다. 왜냐면 책의 낡기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 상관없이 도서관 자체의 얼굴들이 있었고 그 얼굴들을 한 번씩 다 훑어 볼 가치는 충분했다. 비록 경사진 언덕배기 위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외딴 도서관이라 올라오는 데에 열과 성을 다 잡아먹고 막상 안에는 여자가 사랑해 마지 않는 새 책들도 거의 없어보이고 딱 봐도 누더기 천지인 곳이라도 도서관 특유의 위풍당당한 얼굴이 있다면 그 높은 천장과 그 아래 질박하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믿음직한 책상들의 광활한 풍경에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어도 좋을 것이었다. 그럴 때 여자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 모드로 설정하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잘생긴 얼굴들을 찍곤 하였다. 그런 곳은 비록 책이 지저분해도 종종 들러서 적어도 멍하게 앉아 몽상에 빠져있을 자격은 될 터였다. 아니, 아마도 이런 곳에 앉아 있으면 절로 그 차갑게 식은 공활한 사유의 장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종이 위에 펜을 들고 뭔가를 쓰지 않을 재간이 없을 듯했다. 여자는 깨끗한 책이 있는 곳만큼이나 여자 자신이 그 이지적인 기운에 압도된 가운데 그 속에서 어떤 진솔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흘러나오고, 하여 차마 그것들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공간을 필요로 했다.

뜬금없이도 여자는 자살한 작가의 글을 읽는 도중 똥에 대한 잠언집을 쓰고 싶어졌다. 해서 사람들이 뭔가 싶어서 궁금해서 읽다가, 어우 드러워 죽겠네 정말, 이 작가는 뭔데 이렇게 뻔뻔스럽게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해서 앞에 사진을 보면 그때 여자의 교활하면서도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그를 향해 눈웃음을 치고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휴 이걸 그냥, 하면서도 괜시리 애증 가는 작가라 자꾸자꾸 그 책을 사주고 싶어지면 좋을 터였다. 그러고보니 여자는 사랑받는 작가보다는 애증의 작가이고 싶었다. 밀고 당기기도 못하면서 늘 밀고 당기기를 시전하는 작가 말이다. 모든 것에 길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똥도 더 잘 쌀 수 있는 길이 있는 것 같았고 여자는 그걸 책으로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얘기를 아는 사람에게 전화하여 들려줬을 때는 마침 저녁 시간이었는데 여자가 자꾸 똥똥거려서 그 사람에게 미안할 것 같지만 실은 별로 미안하지 않았고 여자도 그저 배가 고팠다. 밥을 먹은 뒤 여자는 다시 잠언집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이 똥에 대한 이야기는 잠언집이라고 해도 결국엔 그냥 궤변집이 될 것인데 허무맹랑한 걸 좋아하는 여자가 쓴 책인 만큼 아마도 궤변을 즐기는 사람들만 찾는 책이 될 것 같았고 얼핏 정말 똥을 잘 싸는 법에 대해 탐구해보는 듯하면서 결국엔 엉뚱한 방향으로 새는,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하는 안드로메다로 빠지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똥으로 시작해서 자아를 찾는 여정이 될 것이고 똥은 사실 이 거룩한 사업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제 딴에는 스스로를 철학가로 자처하고 있으니-비록 개똥철학가에 불가하더라도-그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자위했다.

똥에 대한 잠언집을 쓰고 싶다고 했지만 역시나 이 일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여자는 뭔가에 간절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그렇게 간절하다고 해서 뭔가가 꼭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간절하게 사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며 도대체가 뭐가 그렇게 간절한 건지 그냥 생긴 대로만 살아도 인간은 그럭저럭 제 입에 풀칠 정도는 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입에 풀칠 정도 하고 사는 게 다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입에 금칠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히 예상하건대 사람들은 입에 금칠을 하고 나면 금세 도로 무료해져서 이번엔 입에 똥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종국에는 모든 게 시시하고 무의미해져서 입에 총을 꽂고 자살하거나 아니면 총기 소유가 안 되는 이 나라에서 투신이나 목을 매어 죽기는 너무 끔찍하고 그렇다고 농약을 한 사발 들이키는 건 실컷 속만 골병 들고 죽지도 못할 것 같으니 결국 죽기를 포기하고 옆에 있는 만만한 사람을 학대하면서 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뭐가 됐든 간절한 것보다는 둥글게 둥글게 아니 대충대충 되는 대로 되든가 말든가 신경도 안 쓰고 무성의하게 아주 근본없는 사람처럼 사는 게 제일 좋은지도 몰랐다.

궤변집에 대한 생각이 끝날 때쯤 여자는 자신이 읽고 있는 소설의 저자가 지금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문득 사무치게 와닿아서 슬퍼지고 말았다. 자살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지구 어딘가에서 해를 보거나 달을 보면서 혹은 그것 둘 중 하나가 떠 있는 시공 속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읽는 책의 저자가 이 세상에 없어서 외로워져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살아생전의 사진 속 작가는 아주 험상궂고 날카로운 백인 남성의 얼굴이었는데 유독 인종에 상관없이 그저 다치기 쉽고 유약했던 한 사람으로 보였다. 여자는 딱딱한 양장본 커버가 마치 그의 얼굴이기라도 한 양 책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책의 커버를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보다가 놔두고 다른 거 하고 그러다가 또다시 그 책을 집어드는 걸 보면 아마도 그 책은 여자가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다 읽는 최초의 양장본이 될 거였다.

여자는 어릴 적부터 웬만한 사람보다 책이 더 좋았다. 여자가 사귄 남자들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였는데 개중에는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새삼 존경에 찬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여자는 딱히 놀랄 것도 존경할 것도 없는 것에 되려 사람들의 반응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여자더러 잘난 척을 한다고 눈꼴시어 하기도 했는데 그도 그렇듯이 정작 여자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살아보니 세상에 시덥잖은 사람은 너무 많았고 비범한 사람은 너무 적었다. 그런데 비범한 책은 이 세상에 여자가 죽기 전에 과연 다 읽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시덥잖은 사람들 틈에 치여 온통 시간을 뺏기는 통에 정작 여자가 사랑하는 비범한 책을 만나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기구한 일이었고 그래서 여자는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읽고 싶던 책들을 마구 읽기로 결심했다. 그러한 결심이 있었기에 여자에겐 읽을 땐 신나도 막상 다 읽고 나면 영양가없이 느껴지는 미국산 자기개발 서적들보다 차라리 지금처럼 약간 미친 것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더 나쁘지 않게 다가왔다.

늦은 밤에 자살한 작가의 양장본을 갖다주러 간 도서관은 바닷가 근처에 있었는데 역시나 심하게 경사진 언덕배기 위에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우두커니 놓여 있는 게 마치 누가 성의없이 버리고 간 물건 같았다. 전망이 좋아서 '특색있는 국내 도서관'에도 선정되었다는 그곳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처럼 여자에게 실망감만 안겨 주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어지는 휴게실은 소란스러운 작부들의 목소리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고 여자가 그곳에서 주섬주섬 간식을 먹을 동안 거기서 일하는 작부 한 명은 규칙상 아직 닫을 시간이 안 된 게 분명한데도 여자에게 그가 들어온 현관문을 이제 잠그겠다며 나갈 때는 다른 쪽으로 나가라며 굳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것을 통보했다. 무엇보다 막상 삼 층에 있는 종합자료실까지 올라갔을 때는 바다를 향해 탁 트인 전망 좋은 창가도 소용없이 칠흑같은 어둠으로 꽉 차있었다. 여자는 책을 읽지는 않고 그 어두운 창가에 앉아 간간이 아스라한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저멀리 고기잡이 배들을 보았다. 물론 어두워서 배의 형태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불빛들이 수평선 가까이에 떠서 움직이는 배들일 게 뻔했다. 이 도서관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마도 밝은 대낮에 한 번 더 와야 할 것 같았지만 여자는 굳이 이곳을 다시 찾고 싶지 않았다. 처음 온 곳이어서 반납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여자는 창구에 가서 사서에게 책을 반납하고 지체없이 그곳을 나왔다. 가고 싶은 곳이 없는 여자에게도 도서관 근처의 것들은 유독 더 의미있게 와닿았던지 여자의 걸음은 홀린 듯이 바닷가로 향했다.

어둠 속에 펼쳐진 바다의 얕은 수면 위에는 시커먼 수풀들이 마치 음모처럼 빽빽하게 밀집하여 소리없이 음산한 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여자의 가슴이 선뜩했다. 괜히 왔다 싶어진 여자는 하마터면 도로 발걸음을 돌릴 뻔했지만 마침 왁자하게 지나가는 아이 엄마와 아이의 실랑이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해변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새로 단장한 듯 은은하게 조명들이 빛을 발하는 해변공원은 바다 위로 길이 나 있어 얼핏 꿈의 길처럼 느껴졌다. 실랑이하던 아이 엄마와 아이는 이미 저 앞까지 멀어지고 있었다. 화려한 조명으로 밝혀진 물 위의 길과 그 옆에 음침하게 돋아난 음모 같은 물풀들은 서로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여자는 될 수 있으면 그쪽은 쳐다보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물 위의 길을 걸었다. 청명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걸로 보아 이곳은 아직 사람들의 입소문을 덜 탄 듯했다. 그걸 생각하자 여자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맛있는 걸 혼자 먹을 때 은밀히 기뻐하는 아이처럼 여자는 남들 손에 안 탄 물건이나 장소를 혼자서 조용히 만끽하며 즐거워하는 취미가 있었다.

여자가 사는 도시는 바다와 가까웠고 여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대중교통으로 삼십 분 만에 수평선을 조우하고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바다는 낯설어서 마치 먼 이국에 온 기분이었다. 여자는 낯선 곳에 가면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체감 온도가 낮은 게 아니라 낯선 곳에서는 마치 갑옷을 입지 않은 새우처럼 주눅이 들고 조심스러웠다. 그곳에서 접하는 공기도, 바람도, 사람들도 마치 여자 자신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그 바다는 무척이나 음침했다. 하지만 그래서 여자는 왠지 모를 힘에 이끌리듯 점점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그날만 유독 그런 건지 아니면 개장 시즌이 아니라 시종 그런 건지는 몰라도 공원 안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가로등이 대부분 다 꺼져 있었고 백사장 근처에 다다르자 아예 사람들이 마치 일부러 어둠을 즐기기 위해 거기까지 와서 모이기라도 한 듯 캄캄한 칠흑 속에서 대화 소리와 웃음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꽤나 괴기스러웠다. 모든 게 다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너머에 거대한 바다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철썩. 철썩. 자기를 잊지 말라는 듯 이따금씩 울음 소리를 내는 바다와 여자 사이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밤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그것이 여자의 눈에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자체의 기운으로 전달되었다. 그 광막한 밤의 모래 위에 감히 발을 들일 사람은 없어 보였고 여자도 백사장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백사장까지 발자국을 남기고 가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 포기하고 여자는 그 둘레길을 걸었는데 사실은 그 길을 걷는 것도 여자 혼자 하기엔 께름칙할 정도로 어두웠고 실제로 그 공원에서 여자처럼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조심조심 걸으니 역시 아무리 어두워도 조금씩 어슴푸레하게 사물의 형태가 보였다. 벤치에 앉은 사람들이 시덥잖게 나누는 대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소리만 들리고 아련한 형체만 느껴질 뿐 그 모든 게 완벽한 어둠 속에 보존되고 있었다. 어쩌면 여자보다 더 먼저 온 그들은 자기들 앞을 지나가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더 잘 봤을지도 몰랐기에 여자는 조금 몸가짐을 바르게 했지만 막상 다시보니 그들은 여자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을 거였다. 그렇게 어둠 속을 마치 순례하듯 한 바퀴 돌아오니 다시 백사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그냥 돌아갈 것인가, 여자는 주춤했다. 그때 마침 한 쌍의 남녀가 여자를 스쳐 지나며 경쾌하게 돌계단을 내려갔고 이번에도 여자는 홀린 듯 그들의 뒤를 따랐다. 우유부단한 자기 자신에게 용기를 준 앞의 두 사람에게 조금 고맙기도 하면서 여자는 겸연쩍게 모래 위에 첫 발을 내딛었다.

낯선 모래사장은 문명 속에서 쉽게 경험할 수도 맞닥뜨릴 수도 없는 야만적인 어둠 아래 무겁고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어쩌다 내려오기는 했지만 발이 서벅서벅 빠지는 그 모래 위를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보니 여자는 자기가 거기서 왜 그러고 있는지 몰랐다. 검은 바다는 검은색 파도 소리를 내며 검은 백사장을 적시고 있었지만 마치 그 바다보다 훨씬 더 큰 사막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고 여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의 길을 찾아 헤매듯 걷고 또 걸었다. 밤은 무서운 힘으로 여자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나더니 곧 어슴푸레한 두 사람의 형체와 그들 중 한 명이 쥐고 있는 끈으로 이어진 제법 몸집이 큰 개의 형체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는 제아무리 생면부지의 남이라도 반가웠다. 하지만 개는 마치 그 누구든 제 앞을 막는 사람은 사정없이 내쫓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 갑작스레 여자에게 달려들며 왕왕 짖었고 개 주인은 그에 반해 나른한 목소리로 개의 애칭을 한번 부르며 목줄을 잡아당겨 개를 저지했다. 한마디 사과없이 멀어지는 그들이 다소 야속했지만 여자는 야만적인 광야 속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위안을 느끼며 다시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여자는 언젠가 한 번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파도에 휩쓸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정신없이 파도에 휩쓸려가는 여자를 해변의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바로 그 두려움, 공포가 여자를 사지로 몰고 간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아무도 구해주지 않고 물에 빠진 자신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벌컥벌컥 소금물이 들이치는 입으로 야속하게 응시하며 여자는 이렇게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미 배워 놓은 배영이 문제였다. 목숨이 위급해질 때 여자 자신이 얼마나 두뇌가 영민해지는지를 그때 알았는데 당시 여자가 익사하여 신문에 대서특필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어설프게 배워 놓은 배영과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급작스럽게 빨라진 두뇌 회전력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여자는 굼뜨고 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물에 빠진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시간을 끌어야 하고 누군가가 구해주기 전까지는 가능한 물 위에 떠 있어야 한다는 위대한 진실이 그 순간에 이르러 섬광같은 깨달음으로 올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리하여 죽지 않고 소금물을 잔뜩 입과 코로 흡입해가며 바다를 표류하던 여자를 다행히도 누군가가 알아보았고 그때 여자가 젖먹던 힘까지 다해 살려달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구조가 된 직후에 여자가 자기 몸을 둘러 봤을 땐 방금 전까지 죽을 뻔한 것 치고는 너무 사지가 멀쩡했다. 모든 것들이 다 거짓말같이 여겨졌는데 만약 자신이 죽었더라면 그 모든 일들은 사실로 증명될 터였고 아마 문서로까지 남을 것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여자는 죽을 뻔한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러면 이것은 참으로 거짓말 같은 일이 되고마는 거였다. 여자가 시계를 보니 물에 들어가서 파도에 휩쓸렸다가 구조가 되기까지의 시간은 채 이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물 속에서는 그 순간이 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길었다.

어둠 속에서 여자는 그때 다른 사람들도 모두 파도 근처에서 놀았는데 유독 자기만 물에 빠진 이유는 다들 짝을 지어 놀고 있는데 여자만 홀로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이 파도에 휩쓸려 저멀리 사라졌는데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위험한 순간에 이른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혼자 다니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한 것이라는 교훈은 그때 이미 충분했지만 여전히 여자는 오늘 이렇게 홀로 어쩌면 그때보다 더 위험한 검은 허공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 바다에서 여자는 무언가를 찾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국내에서 가장 독특한 곳이라 하여 실컷 기대를 했는데 막상 와보니 성에 차지 않는 도서관 때문인지도 몰랐고, 미친 사람처럼 거짓말 같은 문장들만 실컷 나열해놓고 그걸 유작이랍시고 덜컥 자살해버린 작가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는 딱딱한 양장본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히 그것도 자꾸자꾸 궁금해서 결국엔 다 봤다는 사실도 어찌보면 불온했다. 어둠 속에서 여자는 이 여정의 끝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여자의 부친은 왜 그랬는지 늘 여자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가족들끼리만 있을 때나 다른 사람이 함께 있을 때나 부친을 보면 마치 이 세상에 여자 따위는 있지도 않은 듯했다. 아버지로 인해 여자의 존재 자체가 어떤 거짓말 같았다. 그런가 하면 모친은 쉴틈없이 여자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는데 앉으면 앉는다고 소리치고 서면 선다고 소리치는 지경이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여자 역시도 남의 인생을 살아볼 수는 없었기에 그런 자기 인생이 얼마나 불우한지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나 갓난쟁이 시절에도 여자가 느끼기에 모친과 부친이 양쪽 모두 여자가 의지할 대상은 아닌 듯했다. 정확히 말하면 어린 여자가 태어나보니 아무도 기댈 존재가 없다는 사실은 절망적이었다. 유독 또래에 비해 일찍 한글은 깨우친 여자는 집에 있는 동화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동화책을 다 읽고 나면 전단지를 읽고 신문을 있고 집에 나뒹굴던 성경책을 읽고 눈에 보이는 글자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고작 대여섯 살 짜리가 뜻 모를 글자들을 읽고 있는 걸 보며 이웃 여자들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각종 문예 대회에서 덜컥덜컥 수상을 했다. 고학년이 되자 학교의 문예부 강사는 조심스럽게 여자의 모친을 불러 진로를 문예 쪽으로 잡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하지만 모친은 그 일을 마치 시간이 남아도는 시간강사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벌인 구실 정도로 여겼고 곧 그에 대한 확답을 내리듯 얼마 안 있어 그 지역 일대의 유명한 스파르타식 입시 학원에 여자를 집어넣었다. 그 후로도 매년 지역 문예 대회에 나갔던 여자는 고등학생이 되어 오랜만에 심사위원으로 그 강사를 만났지만 창백한 얼굴로 멀리서 그에게 짧게 목례만 했을 뿐 더 다가가지 않았다. 강사는 심사위원으로서 이미 여자의 글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몰라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는 뒤통수로 그것을 알았다. 그때 출품한 여자의 글은 자살에 대한 시였다.

더 이상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싶을 정도로 백사장의 한복판이었다. 그 바다에서 익사할 뻔했을 때처럼 지금 이곳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 역시 세상 천지에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여자는 이번에야말로 갈갈이 찢어진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저멀리 안전한 공원 안에서 이곳을 내다보며 지금 저 백사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미친 인간들일 거라고 생각할 터였다. 여자 스스로도 자기가 어딘지 모르게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니 여자는 지금보다 더욱더 가열하게 미쳐보고 싶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 끝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어떠한 틀을 만난다면 그 틀을 원없이 까부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여자는 광막한 어둠 속을 둘러 보았다. 문득 이곳은 어쩌면 여자가 알던 지구가 아니라 온통 어둠으로만 점철된 낯선 행성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오히려 더욱 잘된 일이었다. 이윽고 여자는 가방을 바닥 위로 털썩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모래 위에 쭈그려 앉았다. 여자는 허리춤에 손을 더듬어 바지를 풀었고 바지와 팬티를 쑥 내렸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맨 엉덩이가 드러났다. 심장이 불끈불끈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행성의 심장이 마치 여자 자신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선득한 아랫도리로 허공의 감촉을 느끼며 천연덕스럽게 눈 앞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오랫동안 품었던 원대한 꿈을 이루듯 억눌렀던 요도에 힘을 풀었다. ……조롤조롤조롤조롤조롱조롱조롤조롤조롱조롱조롤…… 마치 솟구치는 바닷물이 여자의 몸을 통과한 것처럼 끊어지지도 않고 쉼 없이 쏟아지는 여자의 오줌은 공허함 가운데 뜨거움으로 시원하게 땅을 때렸고, 모래 위를 적시며 깊고 우직한 구멍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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