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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칼럼]서약서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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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

“나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거나 정치적·종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으며, 정치적 중립의무를 준수한다.” 이달 초 강원도의 한 공공기관에서 내게 평화 관련 강의를 요청하며 요구한 서약서의 한 문구다. 문구는 이렇게 이어졌다. “위 사항을 준수하지 않는 경우 향후 안보통일교육에서 배제되고, 계약 해촉, 손해 배상 등 벌칙이 부과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느닷없었다. 아연했고 오싹했다.

과문한지, 나는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자에게 강의를 요청하며 이런 종류의 ‘서약’을 요구하는 경우를 알지 못한다. 태만한지, 나는 평화를 말하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일절 언급하지 않”는 요령을 익히지 못했다. 소심한지, 나는 혹시 말이 엉켜 “위 사항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낙인 찍혀 “손해배상 등 벌칙이 부과”될지 몰라 몸을 떨었다. 과문하고 태만하고 소심한 나는 “이런 서약은 공산주의자들이나 요구하는 것”이라고 답하며 강의를 거부했다. 서약서를 과하지욕(跨下之辱)으로 여겨 강의를 맡을 이유도 없었지만, 서약서 요구를 사적 일화로 넘길 일도 아니어서 여기 기록하고 기억한다.

강의 섭외 건으로 연락했던 직원은 강의를 거부한 내게 “서약서를 쓰지 않아도 된다”며 회유했다. 아니, 그러면 더 이상하지 않나? 꼭 필요하지도 않은 서약을 왜 요구했나? 응하지 않았더니 그는 ‘정치적 중립’요구가 부당한 것은 아니지 않냐고 따지듯, 가르치듯 맺었다. 나는 웅크렸다. 상황은 끝났다. 결국 서약을 요구한 그 기관이 아니라 서약을 거부한 내가 뭔가 잘못한 사람이 된 듯했다. 내가 마치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으려는 못된 생각을 항상 갖고 있다고 발각된 사람 같았다. 학문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또는 다원주의 관점의 수용과 존중, 비판적 분석과 논쟁의 중요성 등은 다 사라졌다. 서약을 하지 않으니 나는 무슨 당파적인 주장을 펼칠 선동가로만 남았다.

사실 그 공공기관에서 다룰 강의 주제와 내용은 한국의 정치 갈등 쟁점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설사 한국 사회의 논쟁 주제와 관련이 있다고 해도 전문가로서 학자들은 대개 인습적인 것과는 다른 인식 지평과 관점을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피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고 무책임하다. 논쟁과 경합은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빼라는 것은 특정 강령이나 정책만을 전달하고 시민을 훈육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을 드러낸다. 민주시민교육과 평화교육 관련 국제 규범도 항상 다원주의 관점과 논쟁의 필요성을 부각한다. 덧붙여, 평화에 대한 말과 글은 평화부재의 현실을 다루기에 현실 비판이 필수적이다. 국가 권력과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옥죄는 방법이 바로 그‘정치적 중립’의 외피였다. 교육과 학문에서 ‘정치적 중립’ 요구는 권력 비판을 막는 고전적 수법이다. ‘중립’ 여부의 기준과 판단은 권력자의 몫이니 그 나머지는 상상의 몫이다. 물론, 강의와 발표 기회를 제 정치 신념이나 특정 정당의 강령 선전장으로 활용하는 이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 경계해야 한다. 학문공동체 스스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서약서는 그 방법이 아니다. 정반대다. 서약은 검열의 동생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다. 앞의 것도 위험하지만 뒤의 것은 파국이다. 그것은 모두 ‘자유’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자’로서 나는 서약을 거부하고 웅크릴 곳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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