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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포럼]인생몽환(人生夢幻)

원행 오대산 월정사 선덕 조계종 원로의원

살다 보면 수많은 난제를 만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어니 해도 ‘인생’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 사나? 잘 살아가고 있나? 생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어렵고 또 어려운 질문이다.

누구든 생을 두 번 살지는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인생 초보자’다. ‘숨넘어갈 때 비로소 철이 든다’라는 말이 있듯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고, 후회와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 수천 년이 흘러도 철학이 존재하고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인생에서 해답을 찾으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표현하는데,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수시로 변하며, 변하는 것은 겉모습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직접 보고 느낀 현상세계조차 따지고 보면 모두 허망하다. 이를 깨치면 그게 부처지 어디 중생이겠냐는 질문도 있겠지만, 깨치려 노력하는 삶과 허망 속에서 헤매는 삶은 분명 다르다.

‘금강경’은 인생을 ‘몽환(夢幻)’이라며 여섯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즉, 인생이란 꿈(夢), 허깨비(幻), 이슬(露), 번개(電), 물거품(泡), 그림자(影) 같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신라의 승려 조신은 한바탕 꿈을 통해 세속적 욕망은 허무한 것임을 깨닫게 됐고, 장자는 ‘내가 정말 장자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인가?’라는 ‘호접몽(胡蝶夢)’을 이야기했다. 인생이 이럴진대 아득바득 모으고 움켜쥐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생이란 그냥 한바탕 꿈처럼, 허깨비처럼,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것인가?

불교든 기독교든 모든 종교는 ‘공(空’을 이야기한다. 불교는 무소유를, 기독교는 나눔을 말한다. 인생이란 결국 아무것도 없이 헛되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비우고 나눌 때 비로소 가득 차게 된다는 의미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다 그렇다. 이 이치를 모르고 그러모으려고만 하니 사달이 나는 것이다.

요즘 세태는 그 어느 때보다 세속적 탐욕으로 가득하다. 사업가든, 직장인이든, 정치인이든, 가정주부든 눈앞에 보이는 한 줌 이익에 미혹돼 물러섬이 없다. 세계정세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이 땅에 발붙인 이후부터 지금까지 허망한 탐욕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렇게 영토를 넓히고 부와 영광을 축적한들 결국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정치권이 특히 그렇다. 가장 허망한 것이 정치 권력일 터인데, 이슬 같고, 번개 같고, 그림자 같은 권력을 좇는 데 몰두하다 보니 어느 한날 평온할 때가 없다. 그들을 매일 바라봐야 하는 국민은 이제 한숨 쉬기도 지쳤다. 지고 이기는 법, 비우고 채우는 법, 나누고 크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옛날 중국의 마조(馬祖) 선사에게 경전을 통달했다는 분주 무업(汾州 無業)이 찾아왔다.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찬 그가 자신의 불법을 자랑하자 마조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법당은 웅장한데 그 안에 부처가 안 계시는군요.”

어쩌면 지금 우리 삶이 경제적으로 성장해 선진국 대열에 드는 등 웅장한 법당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 부처가 없는 것처럼 삶의 방향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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