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호등]돌봄 사회화가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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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화 사회부 기자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돌보는 그들이 있다. 일 평 남짓한 침대를 일터 삼아, 환자를 씻기고, 입히고, 먹이는 이들, 돌봄노동자들이다.

가정에서도 돌봄에 시달렸을 이주여성들과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의 중년여성들, 한국사회의 가장 약한 이들이 이 고된 일을 떠맡는다. 기술만 남고 돌봄은 사라진 한국의 의료 현장을 그들이 메꾼다. 환자를 들다 허리를 다치고, 씻기다 손이 갈라지는 노동, 아픈 이들을 돌보다 덩달아 골병이 든다는 힘든 노동이다.

그들은 '병상 부족'이라는 말의 진실을 안다. 코로나19 시기 한국에는 단 한번도 '병상'이 부족했던 적이 없다. 다만 돌볼 사람이 부족했을 뿐이다. 가진 자들을 위한 병상은 항상 있었고,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게 내줄 병상은 없었을 뿐이다. 나이들고, 장애가 있고, 아픈 이들은 자물쇠가 걸린 요양시설 안에 갇혀 외롭게 투병하고 죽어갔다. 시설은 언제나 병원에서도 멀찌감치 떨어진 농촌지역에 있었고, 그 대가로 멀끔함을 누린 서울 사립 병원 병상에는 환자 대신 자본이 누웠다. 국가는 그런 학살의 현장을 '코호트 격리'라고 불렀다.

돌봄노동자들은 사실 병원 밖에 더 많다. 다만 사회가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오이 농사를 짓는 보호자 대신 확진된 남동생을 돌봤다는 이주민 2세 소녀, 걷기도 힘든 무릎으로 명태를 말려 생계를 꾸리고 아픈 시어머니를 부양하는 의료취약지의 중년 여성은 모두 사회가 방기한 책임을 온 몸으로 떠맡은 돌봄노동자들이다.

코로나가 곧 끝날 것이라 누군가가 말하는 지금, 불평등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누군가의 일상은 '회복'됐으되 돌봄의 현장은 한결같은 재난상황이다. 돌볼 사람은 병들고, 돌봄이 절실한 사람은 잊혀진다.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저임금, 장시간 노동,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돌보는 이도, 돌봄받는 이도 불행하다. 코로나19 시기 고령층, 기저질환자의 죽음이 '자연스럽고 당연한'사건으로 취급됐듯이, '일상 회복' 논의에서 돌보는, 돌봄받아야 하는 이들의 고통은 소거됐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돌봄으로 태어났고, 돌봄 속에서 눈감기를 원한다. 그래서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은 돌봄노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모든 사회 구성원이 나서 서로를 일으켜세우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주로 여성이 감당하던 고된 일을 이제 모두 같이 하자는 생각, 세상은 그런 생각을 페미니즘이라고 부른다. 돌봄과 페미니즘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회 속에서 여성도, 남성도, 다른 어떤 젠더를 가진 이들도 모두 행복할 수 없다. 일상 회복은 의사도, 간호사도, 교수나 기자도 모두 자신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기꺼이 돌보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이미 돌보는 이들이 모두 알고 있다.

우리의 미래 앞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있다. 하나는 돌봄을 사회화해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누리며 살다 이별하는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취약한 가족구성원에게 돌봄노동을 전적으로 맡긴 채 장애나 질병을 얻으면 빈곤 속에서 떠나는 길이다. 시민은 과연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내일은 항상 시민이 원하는 대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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