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법정칼럼]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

 박재형 춘천지법 강릉지원 부장판사

Pacta sunt servanda(팍타 순트 세르반다). 필자가 법대 1학년 풋내기 시절 민법 강의 첫 수업에서 들었던 라틴어 문장이다.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라는 뜻으로, 로마법의 근간이 되는 핵심 법원칙이었고, 오늘날에는 전 세계 민법과 국제법의 대원칙이 되었다. 모름지기 약속은 그것이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조약이든, 개인 사이에서 문서에 의하여 체결된 계약이든, 친구 사이에서 구두로 이루어진 것이든,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 만약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약속불이행이 용인되는 사회라면, 그로 인한 혼란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 재판을 하다보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소송까지 오게 된 사건이 다수이다. 'Pacta sunt servanda' 원칙을 어겼으면, 어긴 사람에게 법적 책임을 물리면 간단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법적 책임을 물리는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당한 피고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하여 다양한 방어전략을 수립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방어전략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전략들이 가능하다. ​약속 자체가 없었다, 약속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은 맞는데 약속이 성립할 정도까지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약속을 하였으나 당시에 치매상태(의사무능력)였다, 상대방에게 속아서 약속하였다, 중요한 내용에 대하여 착오에 빠져 약속하였다, 약속은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라 나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아무런 권한 없이 한 것이다, 나의 대리인이 약속하였는데 권한을 넘어서 약속하였다, 약속이 너무 오래되어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

​ 민법을 공부한 경험이 있는 분은 눈치채셨겠지만, 앞서 예를 든 전략들은 모두 민법 총칙(민법 제1조부터 제184조까지)에 등장하는 내용 중 일부이다. 민법 조문이 가족법 부분을 포함하여 제1118조까지 있음을 감안하면, 민법에 규정된 전략만 해도 엄청나게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법률이 민법만 있던가? 민사 사건과 관련된 법률은 민법 말고도 상법, 약관규제법, 방문판매법, 전자거래법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피고만 똑똑하게 방어 전략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원고도 방어 전략을 무력화 시킬 공격 전략을 세운다. 예컨대, 사기를 당하여 약속하였으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는 방어전략을 세운 피고가 있다고 하자. 이에 대하여 원고는 다음과 같은 공격 전략을 들고 나올 수도 있다. 즉, 비록 피고가 속아서 약속하였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이를 알면서 약속 중 일부를 이행하였으므로 나머지 약속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송에서 원고와 피고는 각자 공격, 방어 전략을 세워서 열심히 다툰다. 그리고 본인들의 전략이 타당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수의 증거도 제출한다. 소송 기록은 쉽게 수 백 페이지에 달하고, 많게는 몇 천 페이지를 넘어간다. 한 사건의 심리가 짧게는 수 개월만에 끝나기도 하지만,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만 있다면 판사도 한 명으로 충분하겠으나, 아쉽게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고, 사건 수도 그에 비례한다. 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리는 것은 약속 당사자에게는 물론 판사에게도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사들은 오늘도 재판을 준비하고 판결문을 작성한다. 'Pacta sunt servanda'는 누구나 지켜야 하는 대원칙이고 법치국가의 근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법치국가는 우리 모두의 약속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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