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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50년만에 마주 앉은 그들, 희망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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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승운호 선장 딸 노력으로 50년만에 다시 만난 선원들
“당당히 피해를 마주하고 진실규명 끝까지 함게 하겠다”
납북간첩조작 피해자 이성국씨 “떳떳해질 희망 생겼다”

◇50년만에 다시 만난 속초 승운호 선원들

#1 “배가 납북된 것은 내 죄이니 다른 선원들은 빨리 내보내주시면 좋겠다”

1971년 8월 오징어잡이에 나섰다 납북돼 1년 이상 억류된 후 1972년 9월 속초항으로 돌아온 승운호 선장 고(故)이진형씨의 진술이다.

아버지의 진술서를 본 딸 이영란(58·속초) 씨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당시 함께 배에 올라 납북된 선원들, 승운호의 동료들을 떠올렸다.

50년 지났지만 승운호 선원들의 삶은 50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간첩'이라는 살 떨리는 단어가 다시 떠오를까 봐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하고 살았다. 고문도 잊히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취급을 받았던 그때,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기억만큼은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아야진 승운호의 비극과 50년만의 재회=고성 아야진 승운호 선원 23명은 1971년 8월2일 오징어잡이에 나섰다가 납북된 후 1972년 9월7일 속초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낯선 곳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몰려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서로를 잊고 살고자 했다. 참혹했던 과거가 되살아날 것 같아서였다.

진실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이들의 억울했던 삶을 바로잡는 기회가 만들어진 것은 정확히 50년이 지난 2022년이었다. 2022년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승운호 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선원들을 간첩으로 내몰았던 이 사건에 의혹이 컸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의 결정이 내려지고 한 달쯤 지난 후 속초 동명동의 어느 횟집에서 23명의 선원 중 생존해 있던 12명은 서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납북 당시 막내는 16세, 많게는 40대였던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고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끌어안았다. 말 대신 가슴에 맺힌 한(恨)들이 울음소리로만 퍼져나왔다. 승운호 사무장이었던 이정기(73·전남 보성)씨가 모두의 얼굴을 보듬으며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어? 그래도 이렇게들 살아있으니 만날 날들이 오네…” 얼굴에 흐른 눈물자욱을 손으로 지우던 이들은 그제서야 조금씩 얼굴을 폈다. 서로 묻고 대답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웃음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이 만남은 고(故) 이진형 승운호 선장의 딸 이영란씨가 직접 전국을 수소문해 이뤄졌다. 이씨는 “최근에서야 본 아버지 진술서에 ‘배가 납북된 것은 내 죄이니 다른 선원들은 빨리 내보내주시면 좋겠다'라고 써 있더라. 그 문구를 보고 눈물이 나 제대로 잠을 못 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살아계셨어도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을 거라는 심정으로 수개월간 연락처를 알아내고, ‘돌아가시기 전 호적에 빨간 줄은 지워야 하지 않겠냐’고 호소해 모셨다”고 말했다.

◇고(故) 이진형 승운호 선장의 딸 이영란씨.

■선장 딸이라는 책임감에 선원, 유족들 찾아나서=이씨는 50년 전 아버지가 겪었던 아픔을 다시 떠올렸다. 고통스런 기억이지만 그래야 할 책임감을 느낀 것이다. 이씨는 “아버지가 납북되셨을 때 제 나이는 8살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고 나서 두들겨 맞고 안방에서 며칠을 못 나오시고 어머니가 우리는 안방에 못 들어가게 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이어 “친정 어머니가 최근 치매에 걸리셨다. 나는 까마득한 어린 옛날인데 어머니가 치매가 걸리신 이후 아버지가 많이 맞았다며 납북 이후 일들을 매일 읊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과거를 더 많이 알게됐다”고 말했다.

끔찍한 기억이자 50년간 서로를 잊고 살았던 선원들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씨는 “모두 고성 아야진이라는 동네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납북사건 이후 흩어졌고 알음알음 연락처를 알아내 연락하고 설득했다. 열두 명을 모시는 부산, 전남 보성, 울산, 원주, 인천, 경기 여주 곳곳에 계시고 제일 나이 많은 분이 93세였다”고 말했다.

연락이 닿아도 이들을 다시 만나는 것은 더 어려웠다. “처음에 만나지 않겠다고들 하셨다. 굳이 과거를 파헤쳐 더 아플 것이라 생각했다” 면서 “하지만 내가 선원들을 찾아야 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억울함은 풀고 가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여기저기 찾고 또 찾았다”고 말했다.

50년의 고통에도 이씨는 억울함을 풀 기회가 생겼다는데 기뻐했다.

이씨는 “선원들에게 (진실규명) 신청하자고 했더니 자녀들 때문에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자녀들은 아버지를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찾을 때마다 같이 엉엉 울었다”면서 “납북귀환어부 사건 피해 유족인 김창권 동해안 납북귀환어부 피해자 진실규명 시민모임 운영위원이 도와주기도 했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과 고성군청 담당 공무원들이 성심성의껏 도와주셨다.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는 언론사, 재판에서 발언기회를 준 판사님, 같이 아파해주고 울어준 분들께 모두 감사하다” 고 말했다.

◇납북귀환어부 이성국씨(사진 왼쪽), 와 또다른 납북귀환어부 피해자인 김춘삼씨. 사진제공=변상철 평화박물관 연구위원

#2 통영에 거주 중인 이성국(68)씨는 16살 때 속초에서 외할아버지가 기관장이었던 어선에 올랐다 납북됐다. 납북과 귀환 후 모진 수사 등으로 고초를 겪었음에도 그는 50년째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다. 한번 바다에 나가면 2~3일을 해상에 머물다 돌아온다. 오랜 감시와 의심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머물 곳은 바다 밖에 없었다. 그는 1971년 명성호를 타고 조업 중 납북되었다가 다음해인 1972년 9월 귀환했다. 이로인해 전과자가 됐고 1981년에는 경찰에 불법 연행돼 간첩으로 조작됐다. 80일간 고문을 당한 후 9년을 복역했다.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의 가장 전형적인 피해자다.

■ 납북 후에도 배를 탄 지 50년=이씨는 담담하게 납북 당시를 회상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5살에 배를 처음 탔다. 16살 때 외할아버지가 기관장으로 있는 배에 탔다가 납북됐다” 고 돌아온 후 속초시청에 대회의실에 끌려갔다”고 말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납북기간 건강이 크게 악화되는 등 고초를 치렀다. 그러나 정말 힘든 일은 속초를 통해 돌아온 이후였다. 김씨는 “여인숙에 끌려가 참 많이 맞았다.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반공법을 위반했다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면서 “납북 이후에는 배를 타기 싫어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납북 전력 탓에 한 달에 한 두 번씩 회사에 경찰이 찾아오니 회사에서도 눈치를 받고 결국 고향에 다시 돌아와 배를 탈 수 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감시는 가혹하고 가족들에게도 피해가 갈 정도로 끈질겼다. 이씨는 “항상 감시 속에서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감시가 나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들도 불이익을 받았다. 막내 동생은 원래 경찰대를 가려고 했지만 결국 가지 못했다. 나 아니었으면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했을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 80일간의 고문과 간첩 누명=가장 끔찍한 피해는 그가 납북된 지 10년 뒤인 1981년에 벌어진다. 납북된 경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끌려가 연행돼 89일간의 고문을 받았다.

이씨는 “대공분실 지하실에서 고문을 오래 받은 사람 중 하나가 나다. 저들이 원하는 것을 모르니까. 설마 저들이 나를 간첩으로 만드려고 한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래서 고문 좀 그만해라 대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하겠다고 했더니 옛날 사건을 하나 저한테 갖다줬다”며 “구속 영장도 없이 고문을 받고 9년 을 감방에서 살고 나왔다. 외할아버지 역시 불법 구금을 당했고, 복역 중 건강이 나빠져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9년간 복역 후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전과자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작된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납북 당시 월북을 했다는 혐의는 여전히 유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진실과 명예를 되찾겠다고 다짐했다. 이씨는 “국가가 잘못을 알았으면 수정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아직까지도 나는 국가보안법, 반공법, 수산업법 위반 전과자다. 내가 죽기 전에 진실을 밝히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3년 전 재심 신청을 했지만 기각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씨는 여전히 희망을 안고 있다.

이씨는 “늦었지만 최근들어 국가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하고 얼마 전 창동호 피해자가 무죄가 받았다. 소식을 듣고 주위에 아무도 없지만 혼자서 만세를 불렀다. 그분 때문에 희망이 생겼다”면서 “지금이라도 무죄를 밝혀주신다면 후손들에게 나는 잘못이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죄를 씌우면 안 된다고…끝까지 싸울 생각”이라고 다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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