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정일주의 지면갤러리]'미디어아트'개척…과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괴짜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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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백남준-예술을 통해 전 지구적 소통과 만남을 꾀하다

기존 예술 규범 넘어 급진적 퍼포먼스 실험 존 케이지와의 만남서 터진 예술적 포텐

비디오 영상에 조각·설치 작품 결합…비디오 신디사이저 개발 작품관 탄탄히 다져

백 작가 탄생 90주년 맞아 '다다익선' 활동 재개…1,003대의 티비 탑 여전히 관심 뜨거워

◇보존·복원 완료된 다다익선(2022) 우종덕 제공

오래도록 숨이 멎었던 ‘다다익선’이 부활했다. 백남준(Nam June Paik, 1932-2006)의 탄생 90주년을 맞아 지난해 9월 15일 ‘다다익선’이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가동이 중단된 지 4년 만의 일이다. ‘다다익선’은 백남준 작품 중 최대 규모로 꼽히는, 1,003대의 텔레비전 탑이다.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은 1988년 제작 당시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보존·복원 과정 중에도, 또 재가동을 완료한 지금도 여전히 뜨겁다.

다다익선 건설 공사(1988).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존 케이지와의 만남에서 터진 ‘예술적 포텐’

‘가장 현대적인 예술가’로 꼽히는 백남준은 1932년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서울과 홍콩에서 중학교를, 일본 가마쿠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도쿄대학교에 진학해 미학을 전공한 후,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으로 졸업 논문을 썼다. 1956년 독일 뮌헨대학 유학을 계기로, 유럽 철학과 현대 음악을 공부하며 동시대 전위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한다. 그러면서 기존의 예술 규범과는 다른 급진적인 퍼포먼스를 실험했다.

그런 그에게 예술적 역량을 틔워준 결정적인 만남이 있었다. 바로 1958년 8월 다름슈타트의 하계 강좌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1912-1992)를 만난 것이다. 존 케이지는 미국의 현대음악가로 작곡 외에도 판화 제작, 드로잉, 글쓰기, 버섯 연구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현대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존 케이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곡은 ‘4분 33초’로, 연주자가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작품이다. 백남준은 그에게서 절대적인 침묵이란 없으며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사고의 터닝 포인트'를 경험한다. 이 깨달음은 ‘존 케이지에의 경의’(1959),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린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1960) 등 작품으로 결실을 보았다. 전자음악에 머물러 있던 백남준은 부단히 소리 콜라주를 시도하거나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음악이라는 영역을 해체했다. “내 삶은 1958년 8월 저녁 다름슈타트에서 시작되었어. 존 케이지를 만나기 전 해인 1957년이 내게는 기원전(B.C) 1년이 되지”라며, 백남준은 존 케이지를 기렸다.

◇백남준 作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전 세계에 생중계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

새로운 미디어를 이용한 예술을 모색하던 백남준은 1963년 텔레비전의 내부 회로를 변조하여 색다른 예술 작품으로 구현한다. 그리고 이들 작품을 선보인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통해 미디어 아티스트의 길로 나아갔다. 1964년에 미국으로 이주하며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사용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비디오 영상뿐만 아니라 조각, 설치 작품과 비디오 영상을 결합하고,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개발하여 작품세계를 탄탄히 다졌다. 여기에 음악과 신체에 관한 탐구까지 더하며, 백남준은 돌올한 예술세계를 구축한다.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전 세계를 무대로 펼친 경이로운 작업이 있다. 1984년 위성을 이용해 전 세계에 생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그의 예술적 상상력이 어떠한 규모인지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예술가 친구들을 총동원한 이 작품은 뉴욕과 파리의 스튜디오를 연결하여 전 세계 사람들에게 존 케이지, 샬럿 무어맨, 요셉 보이스의 연주와 머스 커닝엄의 춤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들의 만남을 지켜보게 했다.

더욱이 백남준은 각 연주 장면을 화려한 비디오 이미지로 조작, 변주하여 사람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이미 존재하던 것들을 전파에 담아 새로운 세계를 제시한 그에게 언론과 평단은 ‘전 지구를 무대로 한 복합적 심포니의 지휘자’라는 수식을 부여했다. 전위 예술과 대중문화의 벽을 허물고, 국가 간에 존재하는 시차와 선입견, 문화적 차이 등을 초월해 지구의 반대편을 연결한 이 퍼포먼스는 평화적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아, 찬사를 받았다.

◇최초 제막 당시 다다익선(1988)

■백남준의 철학이 응축된 ‘다다익선’의 세계

백남준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다다익선’은 1988년 9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램프코어에 설치됐다. 10월 3일, 개천절을 상징하는 1,003대의 브라운관 모니터를 지름 7.5미터의 원형에 18.5미터의 높이로, 한 층 한 층 축소시킨 모양으로 제작했다. 이는 우리나라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새로 태어남을 자축하는 의미를 품고 있다.

설치 이후, 매일 8시간 가량 영상이 상영한 ‘다다익선’은 2000년대에 들어서자 모니터 및 각종 부품의 노후화로 고장과 수리를 반복했다. 특히 2002년에는 작품에 화재가 일어났고, 다행히 조기에 진화했으나 가동은 중단되었다. 이 화재로 이듬해에 ‘다다익선’의 모니터는 기존의 검은색에서 은회색으로 모두 교체되었다. 그후에도 거의 매년 브라운관 수리 및 교체가 이루어졌고, 결국 2018년 2월에 가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철저한 치료를 거쳐, 2001년에 마침내 깨어났다.

이 ‘다다익선’에 쓰인 영상 이미지도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의 경복궁과 부채춤, 고려청자 등과 프랑스의 개선문,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등 각국의 문화적 상징물과 샬럿 무어맨의 연주 모습을 담은 ‘다다익선 Ⅰ’ 등 모두 8개다. 이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세계 인류가 예술과 과학기술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그의 철학이 응축된 것이다.

백남준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독일관 대표작가로 참가하여, ‘유목민 예술가’라는 작업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다. 이후 레이저 기술에까지 영역을 확장하던 가운데, 1990년대 중반 뇌졸중이 발병한다. 그러나 2006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의 예술적 실천은 멈추지 않았다.

◇백남준 作 ‘다다익선을 위한 소프트웨어 영상 8점’(1987-1989).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래에서 온 '미디어 아트의 거장'

미디어 아트의 개척자로서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창의적 작업을 실행한 백남준.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에 대한 사유에 있다고 믿었던 그에게 세상은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동시에 엔지니어인 새로운 예술가 종족의 선구자”, “아주 특별한 진정한 천재이자 선견지명 있는 미래학자”라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백남준의 걸작들과 ‘다다익선’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그의 숨결과 예술혼을 부단히 지펴준다.

◇백남준 作 ‘TV 부처’ .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백남준 作 ‘김유신’(1992).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백남준 作 ‘비밀이 해제된 가족사진’(198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 국립현대미술관 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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