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강원의맛·지역의멋]한파·폭설·바람 대자연이 빚은 맛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숨·명·찾 가이드 (14) 겨울왕국 인제

◇인제 황태덕장

일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날, 해는 빨갛게 타며 금세 내설악의 품 안으로 잠기고, 온 세상이 해뜩발긋하게 빛나던 찰나 감색 어둠이 깔리며 겨울의 정령을 맞이한다.

이곳 인제에서 겨울의 정령은 칼바람이다. 도시 사람들이 웅크리고 숨어들 때, 이곳 주민들은 두꺼운 모자를 쓰고 코와 입이 온통 빨개진 채 밖으로 나온다. 겨울 정령의 힘을 빌려 황태 말리기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이 제철인 인제 북면 용대리는 전국 황태 생산량의 약 70%를 차지하는 곳이다. 6·25전쟁 이후 남쪽으로 피란 온 실향민들이 고향의 맛을 그리고 그리다 1960년대 초 이곳에 덕장을 만들게 되면서 황태는 인제의 상징으로 재탄생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생겨난 음식인 황태가 인제의 상징이 된 시간은 실향민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애달픔의 시간이기도 하다. 북태평양의 드넓은 바다를 주름잡던 명태가 북풍이 부는 설악산으로 불려와 120일간 추위와 바람 속에서 얼었다 녹았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실향민들이 낯선 땅에서 새로이 정착하는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속초와 강릉 바다에서 잔뜩 잡히던 명태는 기후위기로 인해 이제 더 이상 동해 앞바다에 살지 않는다. 러시아의 더 추운 바다에 살고 있던 명태가 어민들의 그물에 잡혀 인제의 덕장까지 먼 길을 온다. 명태를 말리는 이들의 얼굴도 변했다. 이 추위 속에서 명태를 말리는 이들은 절반 이상이 남아시아, 북아시아에서 온 이주민들이다.

동해안 할복장에서 명태의 배를 가를 때, 두 마리씩 코를 꿰어 노란 비닐 끈에 생선을 걸 때, 겨우내 명태가 썩지 않도록 33번의 손길을 내밀 때, 명태가 황태로 거듭나는 모든 순간에 우리 이웃들의 노고가 있다. 사실 이들이 강원의 맛, 지역의 멋을 만드는 이들이다. 노란 끈에 매달린 명태는 덕장 속에서 겨울의 추위를 나고, 3월이면 멋진 황태가 되어 우리의 밥상 앞에 나타난다. 전쟁의 기억, 그리고 한파, 폭설, 바람조차 환상적인 식탁의 하모니로 승화시킨 ‘포용력’이 바로 강원도의 힘이다. 세밑. 솜털처럼 내리는 눈송이가 덕장 위로 포근포근 내려앉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피플 & 피플

이코노미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