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이 사람의 삶]북한서 귀순 정선 정착 리영광씨

-'영원한 자유인'
-"개마고원 옹고집 자연에 얹혀 삽니다."

 동강 상류인 오대천이 흐르는 정선 숙암계곡은 철쭉 군락지로 유명해 봄이면 꽤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다.

 평창진부에서 정선으로 접어드는 길목이 바로 숙암계곡이다.

 정선읍을 출발해 진부쪽으로 30㎞가량을 가다보면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하나 있다.

 이 다리를 건너 왼쪽편으로 난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가다보면 단림마을이 나타난다. 5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의 정겨운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을 지나면 비포장길이 골짜기를 따라 이어진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먼지길 30여리를 오르면 폐분교장이 계곡을 지키고 있다.

 이곳이 단림골이다. 정선에서도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은 깊은 산골짜기이다. 인적이 드물어 멀리서 자동차 소리만 들려도 누군가 찾아오는지 이내 알 수 있을 정도로 적막이 깃든 곳이다.

 폐분교장 옆 복사꽃 만발한 허름한 시골집이 있다. 마당가에 삽살개가 꼬리를 흔들며 손님을 맞는다.

 이 집이 자연이 좋아 자연속에 묻힌 귀순자 리영광(李榮光·57)씨가 아내와 함께 사는 보금자리이다.

 손님을 맞는 리씨는 정결한 베이지색 개량한복차림이다. 화사한 봄풍경과 어우러져 더할 나위없는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가 방문객들에게 권하는 첫 접대는 뒷산 계곡에서 끌어온 물 한잔이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그야말로 자연수다. 짐승과 새들과 나무와 풀들이 먹고 혹은 그들의 배설물도 섞여 있음직한 바로 그런 물이다. 그는 “이곳에 정착한후 줄곧 먹어왔지만 아무 탈이 없다”며 손님들에게 기꺼이 권한다.

 집주위에는 그가 심어놓은 복숭아 10여그루가 봄기운을 못이겨 연분홍 꽃을 활짝 피웠다. 그는 어느가지 꽃망울이 먼저 피었는지 어느 나무에 먼저 벌과 나비가 찾아드는지 어느나무의 꽃이 더 탐스러운지 시시콜콜 설명했다.

 그의 집은 300여평 남짓한 터를 잡고 있다. 전형적인 산골집인 본채와 화장실이 달린 창고 원두막이 전부다. 건물이 차지하고 남은 자리는 모두 텃밭이다. 텃밭은 이른바 유기농의 산실이다. 비료도 없고 추수도 없고 돌보지도 않는다. 그냥두고 자라는대로 나는대로 필요한만큼만 먹는다.

 본채는 안방과 부엌 서재로 나눠져 있다. 부엌에는 커다란 솥이 걸린 아궁이와 기본적인 세간살이가 있다. 부뚜막에는 그릇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안방문은 하얀 창호지를 발라 아늑함이 돋보인다.

 서재는 그가 자연을 더 많이 알기 위해 필요한 많지 않은 책들이 있다.

 리영광(李榮光).

 그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만 봐도 그의 삶을 가늠케 한다.

 어떤 이는 그를 영원한 자유인이라고 한다. 또 어떤이는 개마고원 옹고집 귀순용사 남조선대학생 자연인 귀인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모두 그가 걸어온 인생을 투영하고 있다.

 그는 동족상잔 비극인 6.25가 일어나기 4년전 함경북도 학성군 학남면 달리리 가는골에서 아버지 이인선(李仁善·생존한다면 80세)씨와 어머니 이인권(李仁權·생존한다면 79)씨의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을 느끼기도 전인 5살때 그는 아버지 등에 엎혀 외가집이 있는 개마고원으로 피난을 떠났다. 국군과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는 비행기 소리를 싫어한다. 그 시절 피난민들을 향해 날아 다니던 미군 비행기 굉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비행기소리가 날때면 그는 하늘을 닫아버리고 싶단다.

 광할한 개마고원을 안마당처럼 그는 자랐다. 전쟁의 와중에 가족들이 흩어지고 그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자연스럽게 그는 자연을 벗삼아 꿈을 키웠다. 개마고원은 그에게 펼쳐진 자유를 보여주었다.

 개마고원에서 일건인민학교를 거쳐 양강도 혜산고등기계공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혜산사범대(지금의 김정숙사범대) 양성학부에 입학시험을 치뤘다. 자유분망한 그의 성격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를 남조선 대학생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의 나이 21살때다. 그는 시험을 치룬후 이내 인민군에 입대했다. 사범대에 합격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이미 그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이를 먼저 알았더라면 그는 선생님이 됐을지도 모른다.

 자유를 갈망해 온 그는 엄격한 군대생활이 싫었다. 입대 3개월만인 1967년 9월18일 추석날 밤 민족분단의 상징인 38선을 넘어 귀순을 감행했다. 동부전선 향로봉 인근으로 11시간에 걸친 사투끝에 남한쪽 북방한계선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를 “나를 찾던 인민군들이 100여발의 소총을 난사했지만 모두 피해갔다”며 “아마도 전우들이 내가 맞지 않도록 총을 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에 도착해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세계일주를 위해 귀순하게 됐다”고 월남동기를 밝혀 각종 언론에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에대해 그는 “자라면서 읽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가끔 볼수 있는 조총련 소식지에서 남녀가 칫솔 하나씩만 들고 세계무전여행을 하는 글을 읽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후에 설명했다.

 어쨌든 이렇게 그의 남한 생활은 시작됐다.

 4개월에 걸친 조사를 마치고 그는 정부에서 마련해준 한국전력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조직사회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그는 5년만에 한전을 그만두고 서울의 작은아버지 집에서 지냈다. 북에 두고온 부모님 환갑을 맞아 답답함을 달래려고 84년부터 강원도 춘천을 찾아 한농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머슴아닌 머슴살이도 했다. 자유가 좋아서였다.

 우연히 정선 단림골을 알게된 그는 춘천과 정선을 오가며 지내다 86년 아예 단림골로 거처를 옮겼다. 자연속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이 되고 싶다는 그의 바램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문명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다. 자연에서 나는 것으로 모든 먹거리를 해결하고 겨울이면 조금은 굶주리며 그만큼 활동을 줄였다. 자연의 섭리대로 사는 것이었다. 그가 그리던 자유가 있어 매일매일이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그러던 그의 생활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이를 본 지금의 아내 박안자(52)씨가 멀리 부산에서 그를 찾아와 2주일만에 결혼을 하게 됐다.

 그는 자연만큼이나 아내를 사랑한다. 자연과 함께 아내는 그에게 소중한 친구이다. 이순을 바라보는 그는 세계일주의 꿈을 접었단다.

 그는 서양을 싫어한다. 동양의학을 신봉한다. 대부분 걸어다니는 그는 가끔 자전거를 탄다. 향이 없고 색깔이 없는 음식은 안 먹는다. 그는 자신이 자연에 얹혀사는 존재라고 말한다. 집주위에 한뿌리씩만 옮겨놓은 산나물들이 해마다 씨를 퍼뜨려 늘어나는 것을 보며 신비로움을 느낀다. 돋아나는 새싹을 보며 생명의 존귀함에 그는 전율한다.

 그는 세번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한다. 어린때 폐렴이 그랬고 쌈을 잘못먹어 위가 멈췄을때가 그랬고 38선을 넘을때가 그랬다고 한다.

 지난 3월에는 이런 그의 삶을 담아 자전수필집 '개마고원 옹고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맘이 내키는 책쓰기는 아니었지만 북에 두고온 가족들이 혹시 이 책을 보고 그가 남에서 잘사고 있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는 생각에 1년동안 준비했다는 그는 좋아하는 자연만큼이나 가족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사무쳐 있다.

 헤어지려는 내방객에게 점점 더 많은 설명을 하는 그에게서 '자연에 동화된 인간이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아이러니를 느꼈다.

 돌아오는 길에 “참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은 진짜라는 겁니다. 참새 참나물 참말···”이라는 그의 말이 귀전에 울리며 자연의 섭리대로 사는 참사람을 본 것 같아 맘이 뿌듯했다. <旌善=劉學烈기자·hyyoo@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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