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여성]중년기 퇴직 남성들 집이 낯설다

돈버는 아내에게 기죽고 자격지심·자책감 시달려

직장인이 체감하는 예상정년이 48.4세라는 조사가 최근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

한 취업 인사 포털사이트가 20∼50대 직장인 1,155명을 대상으로 ‘현 직장에서의 예상정년’에 대해 물은 결과 50대는 59.3세로 답한 반면 20대는 40.8세로 답해 연령대가 낮을수록 예상 정년도 짧았다.

IMF 경제 위기 이후 ‘퇴직’이 일반화되면서 인생 ‘이모작’, ‘삼모작’이란 말도 익숙해 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구조 변화에 비해 사회 인식은 여전히 ‘평생직장’에 익숙해 있으면서 가족 갈등도 빚어지고 있다.

중년기 퇴직 가족의 위기와 원인, 정책 필요성 등에 대해 살펴본다.

# 퇴직 가족의 비애

2년 전 교단에서 정년 퇴임한 김인수(가명·64)씨는 요즘도 집이 낯설다.

전업주부인 아내의 내조를 받으며 가족생계를 부양했던 가장(家長)이었지만 퇴임 이후에는 자신이 하숙생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매월 지급되는 연금의 사용 결정권은 아내에게 넘어간 지 오래.

김씨는 아내에게 매주 15만∼18만원씩 용돈을 타 쓰고 있다.

어떤 일이든 다시 하고 싶었지만 취업이 쉽지 않다.

60세인 아내는 화장품 판매원으로 일하며 50만∼60만원씩 소소한 용돈벌이를 하며 활기차게 지낸다.

김 씨는 “젊어서는 집안에서 가장 대접을 받으며 살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 괜히 섭섭하다”며 “시간은 남아도는데 할 일이 없는 내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주부 이 모(58)씨는 남편만 보면 울화가 치민다.

공직에 있다 퇴직한 남편이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잔소리를 일삼기 때문이다.

이 씨는 “젊어서는 가사일에 관심도 없더니만 이제는 사사건건 간섭하고 시비를 걸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며“점심 안 차려주고 외출한다고 뭐라 할 때는 이 나이에 웬 남편 시집살이인가 싶다”고 하소연했다.

서울의 은행에서 근무하다 퇴직하고 춘천에 정착한 최 모(51)씨는 요즘 ‘아버지’란 석 자가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

간부급 직원으로 직장에서 잘 나갈 때는 자녀들에게 용돈도 제법 주었지만 요즘은 생활비 충당도 어렵다.

최씨는 “한창 하고 싶은 것이 많은 고등학생 대학생인 두 자녀의 욕구를 채워줄 수 없는 내가 무능한 아빠란 자책감이 든다”며 “이번 학기 첫째 등록금도 대출로 해결했다”고 털어놓았다.

# 가정 내 정체성 혼란

중년기 퇴직 남성의 가정 부적응이 심각하다.

‘일하는 남성’을 전제로 사회 관계를 만들어 온 남성들은 ‘일하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성은 직장인 외에도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친구 등 ‘1인 다역’에 익숙하지만 남성은 다르다.

OO맨, OO장 등 직장과 직급을 자신과 동일시했던 많은 남성은 퇴직 후 텅 빈 사회역할을 채우는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퇴직 공무원인 이 모(65)씨는 “퇴직 후 2∼3개월은 심리적 허탈감으로 몸져눕기까지 했다”며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잔 마시려 해도 경제적 비용이 부담스러워 자주 갖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직 자녀가 학교를 마치지 못했거나, 주택비용 마련을 위해 대출을 갚지 못했거나, 노후를 위한 여유 자금도 없이 퇴직했을 경우에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는다.

생활비와 씀씀이 걱정보다 ‘생계부양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격지심과 자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도시 남성들이 겪는 은퇴 스트레스는 여성이나 농촌 남성보다 심하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윤현숙 교수팀이 도시와 농촌지역의 65세 이상 노인 1,12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도시 남성의 은퇴 전 심리적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63.4점에서 은퇴 후에는 58.3점으로 떨어진다.

반면 도시 여성은 은퇴 전 42.9점에서 오히려 은퇴 후 46.6점으로 높아지고 농촌 남성은 52.9점에서 52.2점으로 비슷해 대조적이다.

이 같은 조사 결과는 서울대 한정혜 교수가 서울지역 거주 만 50세 이상 퇴직자 5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같다.

# 재취업 ‘하늘의 별따기’

은퇴 후 부부가 멋진 황혼을 보내는 꿈은 현실 앞에 무너진다.

여성은 50대 이후에도 서비스업 재취업과 봉사단체 활동이 가능하지만 남성의 재취업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이다.

한 퇴직 남성은 “퇴직자 모임에서 사회단체나 기업에 재취업한 경우는 전체 5%도 안 된다”며 “퇴직 후 오히려 여성들이 더 다양하고 행복하게 시간을 잘 보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6·25전쟁 직후 베이비 붐 세대인 한국의 ‘5060세대’와 일본의 2차대전 직후 세대인 ‘단카이 세대’는 닮은꼴이다.

일본에서는 은퇴하고 집에서 지내는 남편을 ‘누레오찌바(ぬれ落ち葉·젖은 낙엽)’라고 부른다.

은퇴 해 뚜렷한 일없이 아내 주위만 맴도는 모습이 마치 구두 뒷굽에 붙어 떨어지지 않은 낙엽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내가 이사 갈 때 버리고 갈까 짐칸에 먼저 올라탄다’, ‘아내 따라갈 때까지 따라가다 반상회까지 간다’는 식으로 젖은 낙엽을 표현하는 유머가 회자되고 있다.

은퇴 후 남편을 돌보느라 아내의 스트레스도 높아진다.

1991년 일본에서는 은퇴 남편으로 아내의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져 신체적, 정신적 이상이 생기는 것을 일컫는 ‘은퇴 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이란 신조어가 생겨났고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 성역할 고정관념 버려야

중년기 퇴직 남성은 주로 노동, 노인문제로 여겨져 가족정책이 수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퇴직 가족의 위기를 정책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올해 제기됐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변화순 박사팀은 지난 1월 40∼65세 미만의 퇴직 남성 100명을 심층면접 조사한 ‘중년기 퇴직 남성의 부부의 성역할의 변화와 성평등 실현방안’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변화순 박사는 “남성이 곧 생계부양자라는 인식은 가부장적 가족구조와 평생직장 시대의 이야기”라며 “여성권익 증진으로 가부장제가 약화되고 퇴직으로 평생직장 개념이 약해지고 있는 만큼 가정 안에서 남성의 역할이 재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40∼50대 중산층의 경우 남편은 돈을 별고 ,부인은 집안일을 하는 성역할에 익숙해져 있어 퇴직 뒤 갈등이 커지는 만큼 고정적인 성역할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최근 서초구청, 동대문구청, 부산, 대구 달서구 건강가정지원센터 등에서 운영하는 ‘중년기 부부 대화법’ 등의 프로그램이 운영될 필요가 있으며 50대 이상 남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노동시장의 경직성도 정책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순 박사는 “양성평등한 관점에서 가족정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지만 가족업무가 복지부로 이관되면서 불투명해지고 있다”며 “인생에서 퇴직이 2∼3번씩 겪도록 일반화되는 만큼 가족정책도 수립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하림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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