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의 부에노스 아이레스①
아르헨티나에 가면 독재자 페론과 그의 부인 에바 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들은 근세사의 한 시대를 주름잡았으며 큰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까지도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추앙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불행한 소녀시절을 보냈고 뜻밖의 일로 여배우가 되었으며 마침내 영부인이 되어 남편의 정치생명을 좌지우지하였던 에바, 그녀는 과연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인가? 에바 페론은 1919년 아르헨티나 평원의 시골 마을 로스톨도스의 한 농장에서 요리사였던 어머니와 농장주인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농장주와의 사이에서 다섯 사생아를 나았는데 에바는 넷째였다. 15세에 가출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상경한 에바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다했다. 뛰어난 미모의 에바는 3류 배우나마 단역을 따내기 위해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에 안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가 육군대령 페론을 만난 것은 25세 때였다. 1943년 청년장교단 이름으로 민족주의 성향의 젊은 장교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이 군사정권의 중심인물 페론은 국방장관 노동장관 부통령으로 대통령을 능가하는 중심인물로 성장하면서 국가사회주의의 한 갈래인 페론주의의 기초를 닦고 있었다. 페론은 1930년대 말 젊은 장교시절 주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국방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유럽사회를 휩쓸던 파시즘에 매료되었다. 미모의 에바는 50세의 페론을 만나 밀회를 즐겼고 그의 정부가 되었다. 에바는 일찍이 페론에게서 지도자의 면모를 발견했던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후 반 정부진영의 선동으로 강경파였던 페론이 구금되자 타고난 미모와 달변의 에바는 페론 추종세력을 조종해 페론 석방운동을 벌였고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사주해 노조 총파업을 유도해 내 페론을 위기에 구해냈다. 페론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준 정부 에바에게 깊은 사랑과 신뢰를 느끼고 그녀와 결혼한다.
1946년 2월 선거에서 페론은 54%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집권 초기 외국자본을 추방하고 철도 전화 등 외국인 소유의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자립노선을 추구하며 페론주의를 지향했다. 독립 이래 추축을 이루어온 농축중심의 산업구조를 개선, 공업화를 추진해 경제자립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비쳤다. 특히 노동입법추진 노동자생활개선 여성의 시민적 지위개선 여성공무담당법의 제정 등 노동자와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가시적 조치들을 취하였다. 이러한 약자들을 위한 개혁입법들은 아르헨티나의 사회적 그늘을 경험한 영부인 에바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며 노동자 빈민들은 이 아름답고 총명한 에바를 성녀처럼 받들게 되었다. 그녀는 페로니스타 부인당을 조직해 정치적 공적을 남겼다. 에바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여러곳에 학교 병원 고아원을 짓고 전국에 순회하는 병원열차로 무료진료를 하는 등 가난한 백성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긁어 주었다. 그녀는 정치적 입지를 서서히 넓혀 노동자 총연맹이 그녀를 부통령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에바의 절정에 달한 인기는 페론의 독재자적 입지를 어느 정도 포장해 주기도 하였으나 점차 군부세력을 포함하는 저항세력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에비타 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바, 혹자는 그녀를 아르헨티나의 독재자에 봉사했고 노동자 빈민을 마취시킨 악녀라고 비난도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행한 많은 초인적 봉사와 헌신들이 모두 거짓이 아니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가진 자에게는 더없이 표독한 영부인이었지만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자상한 나라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삶은 그녀의 출생과 성장배경 그리고 사회의 음지에서 가진 자들에 대해 느낀 분노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여진다.
에바는 1952년 백혈병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페론을 만난 지 10년만이었다. 에바가 죽자 페론의 입지는 좁아졌다. 악화되는 경제와 노동자 군부의 폭동마저 일어나 그는 1955년 실각해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쿠테타 신 군부는 죽어서도 꺼지지 않는 에비타의 신화를 끄려고 그녀의 시신을 이태리로 옮겼으나 추종자들은 압력을 넣어 스페인의 페론에게로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1972년 페론이 일시복귀 해 다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수년 후 아르헨티나로 되돌아와 누울 수 있었다. 페론은 1974년 죽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중심의 리콜레타 묘지에 있는 그녀의 무덤에는 일년 내내 꽃송이가 끊이지 않는다. 그녀의 묘 앞에서 마치 제 연인인 듯 애틋하게 에비타를 회상하는 미남 가이드 헤르난의 모습에서 아르헨티나 국민은 '에비타를 사랑하는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76년 제작된 뮤지컬 에비타와 1996년 마돈나가 주연한 영화 에비타를 통해 세계인에게 널리 알려진 에바와 페론의 사랑과 권력이야기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낭랑한 음률이 귓가에 생생하다. 그녀가 살았으면 지금 88세이다.
최영하·본보 독자위원장·前 우즈벡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