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논술쏙쏙]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

- '과학=객관적'이라는 생각 오류 범할수도

진대현(1318논술연구소 과학논술팀장)

 오늘날 기술과 결합된 과학이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간의 삶 자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과학은 물질적으로나 방법적으로나 큰 힘을 갖고 있어서 흔히 과학적이라고 하면 그것은 옳고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까지 있다. 그래서 과학은 일상 속에서도 뭔가 특별한 장점이나 신뢰성이 있는 지식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과학이 갖고 있는 특별한 것은 무엇이고, 사람들이 그토록 신뢰하는 과학의 성격은 무엇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과학에 대한 이해에 아무런 문제는 없는 것일까? 과연 과학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것일까?

 1. 일반적인 의미의 과학

 우리가 말하는 과학(science)은 지식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라틴어 'scientia'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과학은 체계적인 지식이나 신뢰할 만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모든 영역의 학문이 과학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과학이라고 하면 좁은 의미에서 자연과학, 즉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과학적 방법에 의거해 신뢰할 만한 지식을 얻는 학문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과학, 즉 자연과학은 크게 자연현상의 기본원리를 추구하는 순수과학과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기본원리를 응용하는 응용과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이 결합되어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현대사회에서는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을 과학적 방법에 의거해 탐색하고, 설명하며, 예측하는 경험적 과학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과학적이라고 하면 객관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논리적 절차를 따른 행위와 결과라고 믿는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이란 말을 과학적 방법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보통 과학적 방법이라고 하면 신비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원인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리적인 원인만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경험적 증거에 근거하여 이론을 검증해낸다는 것을 뜻하며, 분석적이고 체계적이란 의미 또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방법론적 의미에서의 과학적이란 표현은 대단히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통상적인 과학탐구 활동은 하나의 문제와 가설로부터 출발해 미리 내린 잠정적 결론인 가설의 옳고 그름을 검증하는 연역적 방법이나 여러 관찰 결과를 종합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귀납적 방법을 이용해 진행된다. 그래서 통상적인 과학탐구는 '문제인식→가설설정→탐구설계→탐구수행→자료해석→결론도출'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만일 이 과정에서 얻어진 일반 법칙이 기존 이론과 상충할 경우, 새로운 이론을 만들기 위해 가설을 도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가설은 실험이라는 절차를 통해 다시 검증되고, 이후 비로소 새로운 이론은 우리에게 과학적 지식으로 수용되게 된다. 즉 과학은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 검증됨으로써 설득력을 얻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과학적 방법에 의거해 형성되는 과학은 경험적이면서 이론적인 학문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얻어진 지식은 실증적·객관적·합리적·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2. 과학은 과연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가?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하면 무조건적으로 객관적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것인데 반해, 과학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과학이 오남용됨으로써 과학이 가치중립으로부터 벗어나 부정적인 결과를 도출한다고 주장한다. 즉 과학의 가치중립 문제는 과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사용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일까? 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과학이론의 성립과 수용 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주장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즉 어떤 한 이론이 제기되거나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져 그것이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이론이나 발견으로 인식되어 수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동료 과학자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새로운 과학이론이나 발견의 인식과 수용과정에서 과학자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개입될 여지가 많으며, 이 때문에 혁신적인 이론이나 역사적인 발견이라 할지라도 전문가집단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이론이나 발견은 폐기되고 만다는 사실을 본다면 과학적 사실도 일면 사회적 과정을 거쳐 사실이나 진리로 인정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 - 오펜하이머(John Robert Oppenheimer)의 고민>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43년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훗날 엄청난 역사의 전환점으로 작용하는 원자폭탄 개발에 주역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원자폭탄은 투하되었고 오펜하이머는 과연 과학의 진보가 인간이 진보인지 되물으면서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인간적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 미 국방부에 의해 결정된 원폭투하를 그 며칠 전까지도 해당 연구소의 소장이 정말 눈치 채지 못했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펜하이머 자신은 이른바 순수과학의 순수성 혹은 가치중립성을 더 이상 신뢰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과학자의 순수한 연구 성과와 그 성과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가하는 문제는 서로 별개라고 주장하는 실험실 속의 학자들의 진단은 참으로 무책임한 언명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 또는 과학 활동은 다분히 인간의 가치가 개입된 활동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많다.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20세기 접어들어 과학과 기술이 상호 작용을 통해 급속히 인간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과학 활동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 개발 이후 과학연구는 군사적 전략이나 정치적 정책, 그리고 산업적인 면에서 그 영향력이 커졌고, 이에 따라 과학 활동 자체가 사회 내에서 매우 중요시됨에 따라 과학의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이라는 문제는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런 사례 말고도 과학지식이 객관적이거나 보편타당하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만일 어떤 과학이론이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하기 위해서는 자연탐구와 관련된 모든 분야나 방법을 포괄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예를 들어 동양의 과학, 특히 한의학 같은 분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과학, 즉 서양의 과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실 동양의 과학은 서양의 과학과는 내용이나 형식 그리고 분류 체계 면에서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또한 과학이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하기 위해서는 모든 자연현상을 예외 없이 설명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또 법칙이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다. 뉴턴주의적 고전 역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의해 대체된 사실을 보라! 그리고 과학 연구의 주체인 과학자들의 활동도 근본적으로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 하면 과학자들은 자연을 탐구나 조작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과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과학예찬론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과학의 목적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이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이 현재 인류가 당면한 많은 위기들의 근원이지만, 그 해결책 역시 과학으로 찾을 수 있으며, 따라서 과학은 인류의 생존과 복지 향상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 또는 과학 활동에도 가치가 개입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상대주의적 과학관에 문제는 없을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과학이 객관적이거나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해서 과학적 사실이나 진리가 자의적으로 해석되거나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해석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과학이 갖고 있는 보편성, 객관성, 그리고 상대적 자율성 등을 완전히 무시한 채, 과학을 정치나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서양 중세 시대에 종교가 사실을 왜곡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일 히틀러(Hitler)는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상대성이론을 형편없는 과학이론이라고 매도하기도 했었다. 이런 점에서 과거 구소련에서 일어난 이른바 “리센코”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생물학자였던 리센코(Trofim D. Lysenko, 1898~1976)는 1930년대부터 종자의 개량 등에 관한 연구를 했다. 당시 소련의 저명한 육종학자였던 미추린(Ivan V. Michurin, 1855~1935)은 여러 과수의 새로운 종자를 만드는 등의 업적을 남겼는데, 리센코는 그의 연구를 계승해서 <춘화 처리>를 통해 밀의 종자 개량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즉 겨울에 파종하는 밀의 종자를 봄에도 파종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방식을 알아냈다는 것인데, 개량된 종자는 형질이 완전히 변해 후대의 종자도 봄 파종용 밀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획득 형질의 유전>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멘델, 모건 등이 발전시킨 유전학의 이론과는 충돌되었다. 따라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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