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특집] 도내 항일 발자취
100년 전인 1910년 8월22일 매국노 이완용과 일본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약을 체결했다. 소위 한일병합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에게 국권이 찬탈돼 36년간 치욕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조선 왕조는 일본의 무력 국권 찬탈에 무력했지만 나라를 되찾으려는 백성들의 저항은 거셌다. 특히 원주의 항일의병운동은 1896년 단발령 이후 수차례에 걸쳐 펼쳐져 향후 3·1운동으로 이어졌다. 의병 활동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민족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를 지켜내 세계문화유산으로 승화시켰다. 나라와 역사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한 선조들의 발자취를 되짚어 본다.
1896년 도내 첫 봉기 후 1905년 본격 항일운동
동학농민운동 거쳐 3·1운동 이어 '민주화 성'
■ 원주 항일의병운동, 전국의 항일의지 영향=을미사변(1895년)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반일감정이 폭발해 거대한 반일 의병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원주에서는 1896년 1월 이춘영, 김사정, 안승우 등이 중심이 돼 원주의병이 봉기했다. 이는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배경으로 1905년부터 한국에 대한 정치와 군사, 경제적 침탈을 강화했고 이 같은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이 여러 갈래에서 전개되는 가운데 원주에서도 원용팔 의병장의 원주의병을 시작으로 항일의병투쟁의 깃발이 오르게 된다. 원용팔은 1905년 8월 을미의병 당시 함께 활동하던 회당 박정수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1905년 8월16일 원용팔을 비롯 종제 원용수와 채순묵, 김낙중 등 8명은 원주 주천면 풍정에 모여 정식으로 의병대를 출범시키며 항일투쟁에 나선다. 그리고 1907년 정미의병이 시작된다. 같은 해 8월1일부터 일본은 훈련원에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식을 강행했지만 한국 군인들은 갑작스러운 군대해산에 쉽게 동조하지 않고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강원감영에 주둔하고 있던 원주 진위대는 일본의 군대해산 조치 소식이 알려지면서 대대장 대리 김덕제와 특무정교 민긍호를 중심으로 8월5일 오후2시 무장봉기한다.
하지만 1908년 민긍호 전사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탄압과 회유책으로 인해 원주의병을 주축으로 했던 연합의병부대는 1910년을 고비로 점차 해산되거나 패퇴하고 말았다.
원주 의병대가 추구한 국권회복의 뜻과 전투경험은 1910년대 이후 일제에 대항하는 항일 독립전쟁의 숭고한 이념과 정신적 자산으로 이어졌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원주 정미의병 운동의 전개와 단계적 변화'라는 글을 통해 “원주지역은 을미의병 이래 여러 차례 반일 의병봉기의 선봉으로서 위치하고 있었다”며 “단계적으로 의병운동의 발전을 선도해 왔다는 점에서 정미의병 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왕 교수는 또 “이들의 반일투쟁은 이후 항일 민족운동의 정신적인 지표로 되었고 원주 정미의병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조직, 무장력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닫게 해줬다”고 평가했다.
■ 이어지는 3·1독립운동…그리고 생명사상=조선왕조 500년 동안 강원도의 수부로서 26개 군현을 관할하는 감영이 있던 원주는 중부지방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항쟁도 어느 지방보다 치열했다. 이처럼 격렬한 항쟁은 동학농민운동과 의병항쟁을 거쳐 3·1운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강원도와 경기·충북 등 3개 도의 접경이면서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 수로교통이 편리하고 정보가 빨랐던 부론면에서 일찍 독립운동의 기운이 조성됐고 이어 소초면과 귀래면, 흥업면, 문막읍, 지정면, 호저면으로 3·1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교통이 불편했던 강원도에서는 비교적 늦게 만세시위가 전개돼 3월27일부터 4월12일까지 계속됐다. 4월8일에 이르러서는 귀래 문막 지정면 등 8개 마을에서 9차례의 만세 및 횃불시위가 전개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에는 원주지역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간 인사들을 배출해낸 원주청년회(1926년)가 결성돼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1927년 10월에는 도내 최초로 전국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항일사회운동단체인 신간회 원주지회가 설립되는 등 식민지 치하에서의 항일투쟁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윤병진 원주문화원 사무국장은 “원주가 70, 80년대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 또한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해 항일투쟁, 독립운동, 식민지 치하에서의 끈질긴 저항 등의 역사적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며 “현재의 생명운동까지 면면히 이어 온 원주정신을 호국역사박물관 등의 건립을 통해 우리 후손들에게 자긍심과 애향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상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