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환 의암학회장 의암 유인석 선생을 말하다
원영환 의암학회장 프로필
△1936년 평창 출생
△서울 광운고, 성균관대 문리대 사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졸업
△현 의암학회 회장
◇경력
1967~1980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상임위원
1980~1989년 강원대 문과대 사학과 조교수·부교수·교수
1983년 강원대 박물관장
1989년 강원향토문화연구회장(현)
1992년 강원대 인문대학장
1994년 강원대 평의회 의장
2001년 의암학회 이사장 겸 학회장(현)
2002년 강원대 인문사회대 사학과 명예교수(현)
2002~2005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
2002~2005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전국협의회장
2005~2009년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장
◇상훈
서울시장공로상(1980), 서울시문화상(1991), 강원도문화상(2001)
◇저서
서울육백년사 I·II·III(編)' '한국사의 이해' '의암 유인석 항일투쟁사' 등 다수
의암선생은 1842년 1월27일(음)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유중곤의 둘째로 출생하였다. 이름은 인석, 자는 여성, 호를 의암이라고 하였다. 의암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부를 하는 특별한 아이였다.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도 어머니 가슴에 글씨를 썼고, 세 살 때에는 화장실에 들어가면 재(灰)를 깔고 글씨를 쓰느라고 나오지 않았으며, 다섯 살 때에 조부가 별세하자 어른들과 같이 절하고 통곡하며 슬퍼하였다. 여섯 살 때에는 부모님이 병이 나자 고기를 잡아다 부모님을 봉양하겠다고 강가에 나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으나 고기가 잡히지 않아 슬피 울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어부가 사연을 듣고 메기 한 마리를 주어 이것을 들고 가서 부모님을 봉양하고 기뻐하였다.
의암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6~7세가 되어서는 다른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어른과 같이 사랑으로 타이르며 싸움을 말리는 등,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큰 인물이 될 자질이 있었다. 의암은 14세가 되는 1855년 3월부터 화서 이항로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화서 선생은 의암을 보고 크게 칭찬하고 자기를 극복하고 예의범절을 배우라는 뜻의 극기복례(克己禮)라는 글을 써주었고, 강건하고 큰 그릇이 되라는 뜻으로 의암(毅菴)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의암이 화서문하에 들어갔을 때에는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가 화서의 문인으로 이미 이름난 학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천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던 의암은 당대의 명성이 높았던 화서의 문인이 되어 특출한 선배 밑에서 학문이 일취월장하였다. 의암은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인정이 많고, 넓은 아량과 용기가 있으며, 지도력 있고, 매사를 솔선하여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다.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하자 조선정부는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25세의 청년이었던 의암은 화서선생을 모시고 상경하여 싸워서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스승을 도왔다. 조정 대신들이 결정하기 어려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를 백면서생인 화서선생이 75세의 노구로 상경하여 단호하게 싸워서 적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인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았고, 스승의 강력한 주장이 실현되어 적을 물리치고 국가가 안정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의암은 강인한 정신과 위정척사사상을 확고히 하였던 것으로 이후 의암선생의 위국충정의 굳은 의지는 더욱 확고해 졌고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위대한학자요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섬나라 일본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끊임없이 대륙진출을 꿈꾸며 기회만 있으면 조선을 침략하였다. 특히 19세기 서구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한 일제는 무력을 동원하여 1876년 이른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합법을 가장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으로 침략을 시도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고자 혈안이 되어 날뛰면서 우리의 국모인 민비가 그들의 조선침략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1895년 무력을 동원하여 무참히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게 하는 등 동서고금의 세계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화서학파의 종정이 되어 충청도 제천에서 유생들을 지도하고 있던 의암선생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국가와 민족이 위기를 당하였을 때 선비로서 취해야 할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는 것이며, 둘째는 자결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고, 셋째는 은둔하여 힘을 길러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니 세가지 중 어느 것을 택하여도 선비정신에 어긋나지 않으므로 스스로 선택하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세 가지 길을 택하기로 하였으나 대부분이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죽겠다고 하였다. 한편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항일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1895년 11월28일 원주군 지평면 안창리에서 이춘영, 김백선, 안승우 등이 주동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의암선생은 모친 상중에 있었으므로 고국을 떠나 요동으로 가서 힘을 기르다가 후일을 기약하려고 하였으나 제자들의 거사를 보고 차마 떠나지 못하고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안창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의암 선생의 제자들이 운집해 있는 제천으로 이동하였다. 제천으로 온 의병들은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의병진을 구성하고 단양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병들이 흩어지고 도망가는 자가 속출하였다. 이후 의병진은 통제력을 잃고 제각기 흩어져 패전을 거듭하였다.
의암선생은 흩어진 의병들을 영월로 불러 모아 재기하도록 격려하였으나 의병들은 규율도 없고 사기도 땅에 떨어졌으며, 거기다가 제각기 의병을 거느리고 있는 대장들은 오만하여 전체를 통솔할 수 없었다. 제자들은 의암선생이 대장이 되어 의병을 통솔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의암선생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지키자는 '복수보형'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54세의 노구로 의병대장으로 등단하였다. 붓을 잡았던 양과 같이 나약했던 유인석은 붓을 던지고 칼을 잡자 호랑이 같은 맹수가 되어 추상같은 군율로 의병을 지휘하였다. 의암선생은 조선말기 최고의 지식인으로 아는 것을 실천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의병대장이 된 다음날 의병해산을 목적으로 잠입한 친일관료의 밀정을 비롯하여 의병활동을 방해하려는 4명을 찾아내어 가차 없이 처형하였다. 대장으로 취임한지 하루 만에 밀정들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추상같은 군율로 처단하는 장군을 바라보는 의병들은 모두가 우리 대장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칭송하는 한편 모두가 복종하였다.
장군의 명성을 들은 의병들이 전국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어 3,000여명이나 되었다. 장군은 기세당당한 의병 3,000여명을 거느리고 영월, 평창, 제천, 청풍, 단양, 충주 등지를 점령하고, 충주 관찰사를 비롯한 친일관료들을 모조리 처단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유인석장군의 의병이 도처에서 승리한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밀지를 내려 격려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친일관료들이 관군을 동원하여 일군과 함께 유인석장군의 의병본부인 충주를 공격하였다. 유인석의 의병진은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일본군뿐만 아니라 친일관료들이 동원한 관군까지 의병을 공격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진 의병진은 제천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제천전투에서도 패배하였다. 장군은 서북지방으로 이동하여 후일을 기약코자 하였으나 이곳에서도 불리하여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가 의병기지를 건설하고 힘을 길러 국권을 회복할 것을 다짐하며 1896년 8월28일(음 7월20일) 24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향하였다.
유인석장군은 국권을 회복하면 귀국할 것이나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요동의 나그네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압록강을 건너 혼강의 물길을 따라 천신만고 끝에 회인현 사첨자진 혼강 나루터인 반납초도구로 올라갔다. 그러나 회인현 현재 서본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혼강 강변에는 조선 의병들의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나 국권을 빼앗긴 힘없는 민족으로 어찌하지 못하고 제각기 헤어졌다.
유인석장군은 21명의 측근들만 거느리고 요동지방을 헤매면서 청국에 원군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헛수고였다. 요녕성 통화현 오도구와 팔왕동에 의병기지를 구축하여 의병을 양성하고 동지들과 연락하며 때로는 국내로 잠입하며 거국적인 구국항일투쟁을 전개하려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압박으로 중국이나 국내에서는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
유인석장군은 1908년 5월 러시아로 망명하여 의병정신을 강화하고 의병기지를 건설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하며 안중근으로 하여금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저격을 지시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910년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병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성명회를 조직하고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는 것은 불법이며 무효라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미국, 영국, 중국 등 세계 강대국들에 보내는 등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10년 9월29일 결국 조선을 병탄하였다.
제국주의 일제는 성명회를 탄압하고 중요 간부들을 체포하는 등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후유인석장군은 운산에 은거하여 불후의 명작 '우주문답'을 집필하는 한편 권업회 등을 조직하여 한인들을 도우며 항일 구국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중국으로 이동하여 구국운동과 저술을 하다가 1915년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육신은 가셨으나 평생을 오로지 구국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그 애국애족정신은 요원의 불꽃처럼 꺼지지 않고 민족의 정신으로 승화하여 1945년 8월15일 나라를 찾는 등불이 되었다.
■1842년 1월27일(음) 춘천시 남면 가정리 우계에서 유중곤과 고령신씨의 3남3녀 중 차남으로 출생
■1855년 화서 이항로 선생 문하에 입문
■1859년 여주목사 민종호의 딸과 결혼
■1862년 주자·송시열의 화상을 모시고 삭망으로 배향
■1864년 유중악과 함께 만동묘 철폐를 통탄하는 글 지음
■1868년 스승 이항로 별세로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 선생에게 수학
■1876년 홍재구 등과 일본 수교반대 상소문을 올림(병자위정척사운동)
■1881년 영남·강원유림의 위정척사운동으로 김평묵 선생 전라도 지도 유배시 동행
■1892년 스승 김평묵 별세
■1893년 스승 유중교 별세. 가정리에서 강회 개최
■1895년 민비 시해에 이어 단발령 공포로 처변삼사 논의
■1896년 2월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서 의병을 일으킴. 지평의병 추대로 영월에서 호좌의진 창의대장에 오름. 친일관료 단양군수 권숙, 청풍군수 서상기 처단.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 처단
■4월 관군지휘관 장기렴이 해산 권유문 발송 의병을 해산할 수 없다고 답신
■5월 제천 남산성을 빼앗김
■6월 음성에서 관군을 크게 무찌름
■7월 정선에서 '서행시재정선상소'를 올림. 양구 전투에서 승리
■8월 청도·초산 전투에서 승리. '재격백관문'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회인현 파저강변에 도착했으나 무장해제당해 21명만 망명하고 219명 귀국. 첫 망명지 통화현 오도구 정착. 중국에서 항일운동 전개
■1897년 광무(고종)황제의 초유문을 받고 귀국. 춘천 가정리에 머뭄
■1898년 중국 망명
■1900년 통화 일대 거류민에게 향약 실시. 의화단의 난을 당해 귀국. 황해도 평산 산두재에 머뭄
■1902년 '소의신편' 간행
■1903년 제천으로 귀향. 면암 최익현 등 화서문인과 함께 강수계 조직. 화서선생 문집 간행
■1904년 '납량사의의목강변''칠실분담'지음.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최익현 선생께 향약 실시 건의
■1905년 '을사5조약' 소식을 듣고 전 국민이 항거하도록 촉구하는 글 '통고일국진신사림서' 발송
■1906년 '송원화동사합편강목' 33권 편찬. '서악문답' 지음
■1907년 '이산구곡' 지음. '정미7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서울로 이동해 의병봉기 촉구. 전국 각도 창의소에 '여각도창의소서' 발송
■1908년 '13도창의대진소'에 '여제진별지'를 보내 국내 의병 근거지론 주장
■1909년 한인동포의 결속을 위한 '관일약' 실시. 의병의 '의무유통'을 지어 통제의 법을 세움
■1910년 13도의군 도총재에 추대. '격고13도대소동포'를 국내에 발송
■1911년 한인의 실업권장을 목적으로 조직한 권업회 수총재에 추대
■1913년 '우주문답' '이봉고소초' '병상기어' '한등만필' 지음
■1914년 러시아에서 중국 서간도로 이동. '우주문답' 800여권을 발간해 배포
■1915년 3월14일 방취구에서 74세를 일기로 서거. 난천자 평정산 부인 묘소 옆에 안장
■1935년 4월 춘천 남면 가정리로 이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