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학자 아서 슐레신저(Arthur Sc hlesinger)는 정치란 치유를 찾는 것 (the searc h for remed y)이라 했다. 정치의 기능은 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라는 뜻이리라. 그러나 오늘 날 비단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문제해결이나 치유의 기능으로서 정치는 실패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하향곡선을 그려왔고 이제는 더 이상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 듯하다. 정치는 관중 없는 운동장에서 진행되는 경기가 되어 가고 관객은 장외에 머무르고 있다. 오늘날 평범한 우리 국민 중 자신이 국가가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대중은 유권자로서 국가의 운명과 진로를 결정하는 민주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어르고 달래는 대로 움직이는 충동적이고 감성적인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저항한다. 지금 한국에서 정치의 위기를 초래하는 주범 중 하나가 경제적 불평등에서 오는 양극화 문제이다. 불평등, 양극화 문제는 우리 체제가 바탕을 두고 있는 양대 제도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의 충돌에서 온다.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 간 평등을 기초로 하는 반면 시장주의는 개인 간 불평등을 작동 원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세계화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물론 이 현상은 정치인들이 만든 것은 아닌지라 그 책임을 정치에만 돌릴 수는 없다. 그래도 그 해결은 정치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왜 정치가 우리 사회의 문제에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가? 필자는 그 근본 원인으로 한국정치가 해묵은 이념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본다. 흔히 보수는 시장의 기능을 중시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북한문제에 분명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진보는 경제적 정의를 주창하며 큰 정부를 지향한다. 또 북한에 대해서는 포용정책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쾌도난마식의 논리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종 여론조사를 종합해 보면 우리국민들 대다수의 생각은 보수 진보 스펙트럼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시장에서 개인의 창의성에 근거한 경쟁도 중요하지만 공정한 게임 룰이 있어야 하고, 근면과 재능이 보상 받아야 하나 뒤처지는 사람도 보호받아야 하고, 북한에 대해서도 원칙 있는 태도를 지키면서도 가능한 부분에서는 유연성을 발휘하길 원하는 것이다.
현실의 정치는 어떠한가? 보수나 진보 모두 상대의 가치에 대한 존경이나 이해 표시는 없다. 서로에게 배울 의사는 물론 없다. 그 결과 정치에서 토론과 논리를 통한 타협과 절충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사회는 발전해 나가야하는데 정치는 같은 이슈에서 맴돌고 있다. 대중이 선거에 관심을 갖지 않으니 선거 캠페인은 네거티브가 주류가 되고 응징과 심판이라는 구호아래 분노의 투표만을 유도하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이런 선거를 통해 새 질서가 나올 수 없다.
더 이상 정치가 이념의 족쇄에 묶인 채 해묵은 구호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모두 성장동력을 키워 나가면서면서 중산층의 부담을 경감하며 빈곤층에게 희망을 주며 교육을 살리고 법치를 확립하는 문제를 정치 어젠다를 하여 각자가 생각해낸 처방을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사회 질서는 정치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그래도 정치적 방관자로 머물 수 없는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