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사람이좋다, 강원도가 좋다]“장승이 내 얼굴이고 내 얼굴이 장승, 장승이 곧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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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이 좋아 강원도에 뿌리 내린 장승조각가 이가락씨

“장승은 내 얼굴이고 내 얼굴은 장승의 얼굴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언제부턴가 이곳 맥국의 터에서 맥국의 역사를 추억하며 장승을 다듬고 있는가 봅니다.”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승. 그런 장승이 무작정 좋아 30년 넘게 강원도에 뿌리를 내려 살고 있는 장승조각 기능 전승자 이가락(56·본명:이범형)씨. 그의 하루는 말그대로 장승으로 시작해서 장승으로 끝난다. 간혹 장승과 관련된 강의를 하거나 인터뷰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작업장에 나무를 옮겨와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망치와 끌로 다양한 모양새의 장승을 만들고 연구하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다. 그런 그가 요사이 이사 때문에 분주하다. 춘천 동면 산천리에 세웠던 '장승문화연구소'를 동산면 조양리로 이전하고 있는 것. 산을 등지고 널찍한 마당에 예스러운 너와집 대여섯채가 들어선 '새 집'에 전상국 김유정기념사업회이사장과 함께 방문했다. 이가락씨는 이사를 하는 어수선한 와중에도 자신의 작업실 한편에서 작업이 한창이었다. 반갑게 맞이하는 그를 따라 작업실로 따라 들어서니 각양각색의 장승과 솟대가 마치 그를 호위하듯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1. 강원도에 뿌리를 내리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이가락씨가 강원도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79년 인제에 터를 잡으면서 부터다. 강원도의 하늘을 지붕 삼아 나무들과 고집스럽게 '동고동락'한게 올해로 벌써 33년째다. 당시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강원도에 약관을 조금 넘긴 스물셋의 젊은이가 발을 들여놓은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당시에는 산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강원도에 가면 나무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강원도를 찾게 됐습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기자를 순간 머쓱하게 하는 답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나무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목수일을 했기 때문에 그는 비교적 어린시절부터 나무와 친해질 수 있었다. 나무를 취미삼아 만지던 그때 그에게 장승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냥 그에게 스며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중학교 1학년때 우연히 펼쳐든 잡지 속에서 목격한 일제 때 찍은 장승사진 한장이 그의 마음을 왠지 모르게 편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후 장승에 대한 이미지, 나무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번듯한 직장까지 얻었지만 그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낮에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 나무를 만지는, 몇년간의 '주경야독' 기간을 정리하고 찾은 곳이 바로 인제였다.

“어릴 적 집안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습니다. 공부하고 남들처럼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집안 어른들의 바람이었기 때문에 나무 만지는 일에 유독 관심이 많은 저에 대해 많이들 걱정하셨습니다. 심지어 목수일을 하시던 외할아버지께서도 나무를 깎는 일로는 부자가 못된다고 계속해서 말릴 정도였으니까요.”

집안의 독자였던 그가 본격적으로 나무 다루는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그 일로 누나들과는 등을 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나무에 대한 고집은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오로지 나무에만 전념하던 그에게는 당연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왔다. 그는 그냥 돈 몇 푼 없는 정도가 아니라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심각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제에서 자리를 잡아 바둑판 등 목공예품을 만드는 공방을 운영하게 됐고, 전국에 있는 장승에 대한 자료들도 그 시기 하나, 둘씩 모으기 시작했다. 지난 1989년 10년만에 다시 춘천으로 작업공간을 옮긴 이가락씨는 본격적으로 장승 연구와 제작에만 전념한다.

“당시 업체들에 액자등을 납품하고 있었는데, 물량이 늘어나다 보니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했고, 춘천이 그래도 도시니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춘천 동면 산천리에 작업장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시기부터 목공예 사업보다는 장승을 연구하고 만드는 일에만 올인하게 됐습니다.”

2. 장승 알리기에 나서다

장승에 대해 자세히 알기 위해 1984년부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그는 사람들에게 장승을 알리기 위해 1997년 인사동에 트럭으로 장승을 실어 날라 주말마다 전시를 강행했다. 장승만드는 작업을 직접 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가 작업한 장승들을 순수한 작품으로 보지 않고 미신으로 받아들이는 시선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민초들의 신앙이었고, 우리의 전통문화인 장승에 대한 반응이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해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저 스스로는 오랜 연구와 노력으로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이를 보는 사람들이 장승을 미신으로 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겪은 후 시선을 외국으로 돌렸다. 1997년 우리의 장승과 솟대문화를 알리기 위해 프랑스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첫번째 전시회를 열게됐다. 그가 프랑스로 향할 때 그의 주머니 속에는 단돈 3만7,000원이 들어있었다. 650kg이나 되는 장승을 비행기에 실어 드골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는 2시간 동안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장승문화를 예술로서 인정받기 위한 여정치고는 너무 길고 먼길을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전시는 예상외로 폭발적이었다. 그의 작품을 구입하겠다는 사람들의 문의가 쇄도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 그가 만든 장승이 예술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필름 살돈도 없던 터라 수소문 끝에 프랑스에서 사진유학을 온 학생을 소개받아 전시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수중에 돈 한푼 없으니 그 방법 밖에 없더라고요. 결국 전시회 오프닝 때 작품이 많이 팔려 나가서 그 돈으로 그 학생 수고비를 줄 수 있었습니다.(웃음)”

그에 대한 프랑스의 대접은 한국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전시회를 열면서 1시간20분 분량의 프랑스 예술방송에 출연하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장승 제작 의뢰도 들어왔다. 당시 프랑스 파리 전시를 유심히 봤던 프랑스 남동부 지역의 발랑스시 시장이 모든 체재비를 대는 조건으로 이듬해 전시회 제의를 해왔고 5m 크기의 장승 2조를 제작해 달라는 부탁에, 당시 2만5,000프랑을 받고 장승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코카콜라 유럽법인 회장의 별장에서 29일동안 머무르며 장승을 깎았고, 입소문을 타고 부촌인 그 마을에서만 모두 12~14개의 장승을 제작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해외전시는 룩셈부르크,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로 계속 이어졌고, 그 시기에만 24개국에서 전시회를 열게 됐다.

3. 춘천을 장승·솟대 알리기의 베이스 캠프로

이가락씨가 장승알리기에 전념하는 동안 그의 노력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인식은 아주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장승을 제작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동부로 부터 지난 2001년 대한민국 전통 기능 전승자에 선정됐다.

그는 오히려 외국에서 그 가치나 예술성을 인정한 장승에 대해 아직까지 우리의 인식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인색하다고 일갈한다. 우리의 전통을 단순한 '미신'으로 치부해 버리는 세태가 개탄스럽다고 말한다.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장승제작 교육을 시켜 장승을 정성스럽게 세워놨는데, 밤새 잘라 버린 모습을 보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바꿔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제 맘속 한편에 더 굳게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행한 전상국이사장도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학생들이 장승을 베어버린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 글을 쓴 적도 있었다”며 “우리 고유의 문화를, 또 우리의 전통과 예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옹졸함은 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가락씨는 이제 터를 잡은 춘천 동면 조양리 일명 '밭치리 장승마을'에서 제대로 된 장승문화를 알리기 위한 작업을 새롭게 시작할 예정이다. 이곳에서 장승과 솟대만들기 체험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장승과 솟대가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고 한다. 또 사람들이 편안하게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게스트 하우스를 꾸미고, 평생 모은 목수연장을 전시하는 박물관도 이곳에 개관할 예정이다.

그는 최근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을 작게 제작해 집 안에서도 장식으로 놓고 쓸 수 있는 아이디어 제품을 제작했다. 장승 밑바닥에 자석을 붙여 부피를 상당부분 줄였다. 이 제품을 통해 장승하면 무섭다는 인식을 바꿔 놓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밝혔다. 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장승도 올해 안에 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왕방울만한 눈에 주먹코, 찢어진 입이 장승의 3대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과장법과 생략법, 회화법이 고루 섞여 있는 예술적인 작품이 바로 장승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이 우리의 삶 속에 그리고 세계에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오석기기자 sgtoh@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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