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 진실은 사실 신(神)적 영역 아닐까?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 신적 영역 아닐까? 캔버스에 그려진 인물이 캔버스를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내-존재가 세계를 (완벽하게) 설명하고 객관화시키는 일이 니체, 비트겐슈타인 등이 그렇게 여겼듯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탈진실'은 '진실'을 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애초에 불가능한 기호라는 것이다.
탈사실은 가능하다. 탈은폐의 대립으로서, 사실을 은폐하지 않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명명인 탈은폐의 반대말로서, 탈사실은 가능한 말이다. 간단히, 사실을 은폐하고 호도하는 것에 대한 명명인 탈사실은 기능하다. 탈사실은 가능한 기호이다. 진리, 혹은 진실에 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적어도 사실, 혹은 사실 여부(與否)에 관해 말하는 것은 가능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조차 진실·진리처럼 불가능한 것으로, 혹은 유보의 영역에 둔다면, 성립되지 않을 게 너무 많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부터 얘기되는 살인에 대한 형벌, 도둑질에 대한 형벌들이 무너진다.
정의를 말할 수 없게 되고 관습·도덕 등을 말할 수 없게 된다. '제3의 가능성의 부인'은 법·정의·관습·도덕·사실 등의 영역에서는 유효막심한 것으로 봐야 한다. 형이상학적 정언명령 풍(風)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최소한의 단위로서 가족체계, 그리고 사회체계 및 국가체계를 유지하려면 사실(事實)이 중요하고 사실 여부가 중요하다. 거짓말인지 거짓말이 아닌지가 중요하다. 사실이거나, 혹은 사실이 아니거나이지, 즉 사실 여부를 요청해야지,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거나'라고 두루뭉수리 요청할 수 없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죽었다'와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았다' 두 가지 경우가 존재하지 '소크라테스는 죽었을 수도 있고 아니 죽었을 수도 있다'는 세 번째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3의 가능성의 부인(Tertium non datur)은 삼단논법처럼 논리학의 기본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명백한 사실이다. 탈사실은 금지명제다.
물론, 잘 알려진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말하는 바, 혹은 파인만의 경로적분path integral이 말하는 바(경로적분은 양자가 동시에 여러 경로로 지나가는 것에 관해서이다), 양자(量子)는 지나간 것일 수도 있고 안 지나간 것일 수도 있다. 거기에 있었을 수도 있고, 안 있었을 수도 있다. 고양이는 죽었을 수도 있고 안 죽었을 수도 있다. 동시적으로 관찰해도 그렇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동시적 관찰이 조건이다) 양자가 있었다고 말하는 관찰자가 있고, 양자가 없었다고 말하는 관찰자가 있다. 고양이가 죽었다고 말하는 관찰자가 있고, 살았다고 말하는 관찰자가 있다. 둘 다 사실이다. 죽어 있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사실을 말한 것이고. 살아 있다고 말한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사실을 말한 것이다.
제3의 관점에서 말하면 고양이는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고양이이고, 죽어 있을지도 모르는 고양이이다. 동일한 시간대에 말이다. 양자역학에 이르러 제3의 가능성의 부인이 부인됐다. '제3의 가능성의 부인(否認)'의 부인이 대세인 시대이다? 법적·윤리적 사실 또한 말할 수 없다? 조국 전 장관에 의한 탈사실, 윤미향 국회의원·추미애 장관에 의한 탈사실, 진영논리에 의한 탈사실이 양자역학적이다? 양자역학의 반영이다? 이쪽 진영에서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맞고, 저쪽 진영에서 사실이다라고 하는 것도 맞다? 양자역학적이다. 양자역학이 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