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오석기가 만난 사람]“불교미술 다양성 추구…부처 모습으로 사람을 표현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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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출신 서창원 조각가

◇청남대에 세워진 역대 대통령 동상 작가로도 유명한 서창원 조각가는 “미술학원 문턱도 가본 적이 없다. 중2 때까지 예고가 있는 줄도 몰랐다”며 웃었다. 김남덕기자

불교미술, 그중에서도 독특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불상 조각으로 널리 알려진 서창원(57) 조각가. 횡성군 안흥면이 고향이라는 그는 대통령 별장 청남대에 세워진 역대 대통령 동상을 제작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최근 작업장을 경기도 용인시에서 양평군 서종면 인근으로 옮기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에게 연락을 넣었다. 안부도 궁금하고 해서 지난달 30일 그의 작업장을 찾았다. 아직도 짐을 옮기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지 작업장 내부는 휑하고 어수선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내 그가 작업 중인 불상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빈 공간이 주는 공허함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다.

청남대 역대 대통령 동상 제작 유명…최근 양평에 작업장 옮겨

선화예고→서울대 조소과 엘리트 코스. 유년시절 두각이요?

평범한 아이…학원은 커녕 중학생 시절 미술부 활동이 전부

무대미술 집중하다 서른여섯에 진로 바궈 10년간 작업 몰두

선화예고와 서울대 조소과를 나와 이제는 불상 제작이라는 특화된 예술 장르의 전업 작가가 된 그다. 분명 엘리트 코스를 거치며 유년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소년이었을 게다. 작업 중인 불상 앞에 자리를 잡고는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쌓아놓은 추측의 성 안에서 첫 질문을 뽑아 던졌다. 인터뷰 시작. 그런데 생각과는 다른 답이 돌아온다. “아닙니다. 전 그냥 평범한 아이였어요. 초등학생 때 제가 그린 그림을 보고는 주위에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얘기를 많이 들은 정도라고 할까요. 집안에서 예술을 하신 분들도 없었고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형님이 손재주가 많으셨던 것 같기는 하네요.”

예술고등학교를 들어갈 정도 수준이 되려면 분명 미술학원은 필수 코스일 텐데, 손사래를 친다. 미술학원 문턱도 밟은 적이 없다면서. 예고 들어가기 전까지 받은 미술 교육이라고 해봐야 중학생 시절 미술부 활동이 전부란다. “담임선생님이 마침 미술선생님이셨어요. 미술시간에 자화상을 그리는 모습을 보시고는 미술부에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여러 대회를 많이 나가면서 상도 많이 탔지만 중 2때 까지는 예고가 있는 줄도 몰랐죠.”

중3 때 서울예고에서 열린 미술대회에 나간 그는 별천지를 봤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변두리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중학생의 눈에는 예고의 모습이 꽤나 멋있었던 모양이다.

“집에서는 공고(공업고등학교)를 입학하라고 했어요. 공고만 졸업하면 취직 걱정은 안 했으니까요. 하지만 저 스스로 거길 나오면 뭘 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예고 진학을 결정하고 선화예고를 한번 가봤죠. 그런데 거기서 본 여학생들의 모습이 천사가 따로 없더라고요. 그렇게 선화예고 시험을 보기로 한 거죠.(웃음)”

그가 선화예고에 입학하기까지는 딱 만원의 돈이 필요했다. 그 돈을 갖고 집에서 버스로 두세 정거장 거리에 있는 석고상 공장을 찾았다. 그리고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등 석고상 3개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와 데생을 시작했다. 연습한 그림은 미술선생님께 검사를 받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열 장 정도를 그려 본 그는 덜컥 선화예고에 붙어버린다.

선화예고 1학년을 마치고 전공을 결정해야 할 시기, 그는 동양화와 조각 사이에서 선택의 갈등을 한다. 그런데 그 갈등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2학년 올라갈 때 전공 선택을 다 하거든요. 저는 동양화하고 조소 사이에서 갈등을 했어요. 그래서 책상에 줄을 딱 그어놓고 한쪽은 동양화, 한쪽은 조소 이렇게 써놓은 거죠. 연필 굴리기를 해서 조소 쪽으로 연필이 굴러가는 바람에 조소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하하하하. 아무래도 마음이 이쪽(조소)에 있었나 봐요.”

실기 장학생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선화예고를 졸업한 서 작가의 선택은 당연히 서울대 조소과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인 선화예고 강사로 일하게 된 그에게 뜻밖의 일이 찾아온다. 바로 무대미술이 그것. 무용을 하던 예고 시절 친구의 부탁으로 시작한 무대미술은 그에게 상당한 재미와 만족감을 주는 작업이었다. 국립극장이나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대형 무대가 오롯이 그의 작업공간이었다. 하지만 문득 공허함 같은 것이 찾아왔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인 무대라도 공연이 끝나고 나면 부서져 사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갈등과 고민이 생겨났다.

“대학 시절 은사이신 최완수 선생님이 하루는 '이제는 너만의 작업, 남는 작업을 해야하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고민을 하던 와중에 선생님이 말씀을 하시니까 새로운 진로를 결정하게 된 거죠. 그때가 서른여섯 살 때인데 용인대 대학원에 들어가서 그 뒤로 10년간 작업장 그리고 집 이외에는 나가지를 않았어요.”

무대미술과의 인연을 단번에 딱 끊어버린 그는 불교미술 안으로 들어와 온 정신을 그것을 공부하고 완성해 내는 데 쏟아부었다. 서 작가는 법륜사에서 자신의 개인전을 열면서 대외적으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상도선원 본존불 작업도 그의 개인전을 본 미산 스님의 의뢰로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불상에 개금(改金)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왠지 모르게 가벼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묵직하고 깊이감이 있으려면 오히려 금빛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스님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나중에 개인전을 한다면 불상을 두랄루민(Duralumin·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들겠다고 말씀을 드렸죠. 스님이 흔쾌히 동의를 하면서 본존불을 모실 수가 있었죠.”

당시에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불상이 금빛이 아닌 은빛을 띠고 있는 모습도 그렇지만 사찰 자체가 갤러기 같은 분위기를 냈기 때문에 입소문을 탔다. 현대식 사찰의 전형을 보여 준 상도선원은 서 작가의 무대미술 경험이 더해져 전체적인 공간 구성을 하게 되면서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게 됐다. 서울 송파구의 불광사에 부처님을 모실 때는 호수와 가까이 있어 습한 불당의 특성을 간파하고는 별도 옻알레르기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 가며 작품을 완성하기도 했다. 나중에 주지 스님이 추가로 비용을 받지 않고 옻칠에 석채로 마감하며 불상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그에게 원래 금액대로 불상을 추가 제작해 줄 수 있나 농을 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제 그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 생겼다. 불교미술을 좀 더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이 그 꿈의 중심이다.

“지금은 불상 쪽으로 작업을 하고 있지만 기회가 되면 사람을 표현하는 데에 부처님의 모습, 이미지를 따서 작업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천주교 미술을 보면 다양하잖아요. 불교미술도 그런 다양한 표현이 가능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고도 싶습니다. 지금 세계 최초로 기획하고 있는 음각부조 작업도 그런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을 자꾸 추구해 보고 싶다는 그다. '부처님의 손(手印·수인)'을 표현하는 어떤 작업도 머릿 속에 있는 듯했다. 앞으로 완성될 공간 '이송재'에서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회부장

□ 횡성 출신 서창원 조각가는

△1964년 횡성 生 △선화예고 조소과,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 용인대 예술대학원 회화과

△한국미협회원, 간송미술관 연구원, 서울 조각회원, 만조형연구소 운영

△작품소장처: 춘천 파라미타 선원, 인제 만해마을, 평창 상원사, 양양 진전사, 서울 상도선원, 청남대, 김포 승가대, 하동 봉화사, 미국 불국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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