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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토크 어떻게 지내십니까]“기회 닿는다면…객원가수로 부활 콘서트 한번쯤 서 보고 싶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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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결절로 음악 포기했던 부활 6대 보컬 춘천 출신 김기연씨

◇부활 6집 앨범, 김기연씨가 본보와 인터뷰에서 부활 보컬 시절 이야기와 근황을 들려주고 있다. 박승선기자

김태원의 가장 아픈 손가락

언더그라운드 고수 중의 고수

들어본 적 없는 음색 극찬 받아

앨범 나온 뒤 소리 안 올라가

태원이 형 절대로 원망 안 해

6집 활동 제대로 못 해 되레 미안

'더 이상 못 하겠다' 말하고 낙향

꼬박 100일 술만 마시며 방황

목소리 잃고 찾은 새로운 길

인테리어 사업가 변신 20년

아내와 세 아이 최고의 보물

연기 시작한 아들 잘됐으면

“그냥 아쉬웠어요. 음악을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한 15년 정도 했으니까요.”

김기연을 만났다. 부활의 6대 보컬. 춘천 출신. 음악을 접고 고향에 내려와 인테리어 사업을 한다는 소식을 이렇게 저렇게 건너 들었는데 그 일을 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단다. 옛날 얘기나 하자고 했다. 소주 한잔하면서.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만난 그는 그냥 덤덤했다. '비운의 가수'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나에게 손사래를 쳤다.

“아유~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아쉬운 정도,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오히려 자신에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그 당시 부활의 보컬로 무대에 선다는 건 음악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꿈 같은 거였죠. 그런 꿈의 무대에 설 수 있었으니 저에게는 얼마나 영광이었겠어요. 다만 돌이켜보니 결과가 조금은 원하는 방향으로 안 간 것뿐이지….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김)태원이 형에 대한 원망은 정말 1도 없어요.”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역대 멤버 중 가장 아픈 손가락으로 그를 꼽으며 미안해한 것에 대한 대답인 듯했다. 얼마 전 사람을 찾는 TV 프로그램에서 김태원은 자신이 노래의 음정을 너무 높게 잡아 성대에 무리가 왔고 그것 때문에 음악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던 것 같다며 자책한 모습이 나왔었다.

“그때 아마 키는 제가 잡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 그 정도 높이는 정말 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성대결절이 온거죠.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당황스러웠죠. 그 여파로 6집 앨범 활동도 성공적으로 끝내지 못한 게 못내 아쉽고 미안한 거죠.”

김기연은 언더에서 말 그대로 고수 중에 고수로 불렸다. 당시 헤비메탈 밴드 '킹덤' 보컬을 하다 잠시 쉬고 있던 그는 6집 앨범 보컬을 찾던 김태원의 레이더에 포착됐다. 그리고 빠르게 노래방 테스트가 성사됐다.

“태원이 형이 만나자고 했을 때 기분이 너무 좋았죠. 내가 평소 우상처럼 생각했던 사람이 보자고 한 거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노래방에 들어간 거죠. 노래를 들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노래를 부르긴 했는데…, 사실 그때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만큼 긴장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김태원은 김기연에게 마이크를 쥐어 주고는 노래방 기계에서 에코 등 모든 기능을 껐다. 효과 없이 목소리만 듣고 싶어 했다고 한다. 김태원은 어느 인터뷰에서 당시 김기연의 노래를 듣고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색'이라고 극찬했다. 부활의 3대 보컬 고(故) 김재기의 음색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을 받았다고까지 말했다.

“따로 면접(?)을 한 번 더 보고 나서야 합격 전화를 받았어요. 그런데 한 달 안에 14㎏을 빼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죠. 춘천에 내려와서 거의 보름 동안 땀복을 입고 매일 뛰었어요. 그래도 효과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한 거죠. 아마도 이때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 아닐까 생각이 되기도 하고요.”

하루에 밥 한 공기. 그리고 나머지는 소주로 채웠다. 안주는 오징어. 그것도 씹어 삼키지 않고 빨아 먹는 용도였다고 한다. 자신이 꿈꾸던 무대에 서기 위한 그의 몸부림은 극한까지 자신의 몸을 내모는 쪽으로 흘렀다. 그러니 하루에 1㎏씩 빠지더란다. 하지만 노래를 녹음하고 실제 무대에 오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노래를 녹음하고 있을 때도 몰랐어요. 어느 날 노래 연습을 하는데 갑자기 소리가 올라가지 않는 거예요. 난감했죠. 6집 앨범은 나오고, 이제 홍보를 위해 무대에 올라야 했는데 말이죠. 이 앨범이 부활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 때문에 저도 무리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나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요.”

당시 최고의 음악 프로그램이던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나가 제대로 된 무대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TV 프로그램에서는 립싱크를, 라이브 무대에서는 술을 먹고 오르기를 반복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리 예정돼 있던 스케줄만 소화하고는 부활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니 음악을 포기하고 만다.

“더 이상 못 하겠다고 말을 했어요. 미안하기도 하고. 제가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는 긴 머리를 자르고 춘천으로 다시 내려왔죠. 대인기피증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친구들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정신 못 차리고 꼬박 100일을 음악을 들으면서 술만 먹었어요. 음악이 다였는데 인생 자체가 술로 바뀐 거죠.”

1999년 나이 서른에 목소리를 잃고 음악을 떠나게 된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길을 찾는다. 음악을 하기 위해 했던 막노동 일이 떠올랐다. 연습실비와 합주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꽤나 오랜 시간 막노동을 했었다. 그러다 보니 건축, 인테리어 기술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냉담했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 그냥 음악이나 하라는 얘기를 엄청나게 하더라고요. 하기야 평생 음악만 하던 놈을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공사를 맡기겠어요. 저라도 못 믿지. 다행히 친구와 동업을 하면서 일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어요. 물론 그 사이 사기도 엄청나게 당하고 공사비 떼인 적도 많지만 또 그렇게 살게 되더라고요.” 그는 이제 어떤 원망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잘 알지 못하는 부활의 6집 앨범 '이상시선'이 그래도 자신에게는 정말로 꿈 같은 기회였다고 말한다. 삶을 바꿀 수 있게 도와준 존재였다고도했다.

“그런데 부활의 6집 앨범은 제 음악 인생에 있어서는 마지막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든 시작의 의미도 갖고 있어요. 결혼을 반대하시던 장모님께 6집 앨범을 보여드리니 20분 만에 결혼을 허락해 주셨으니까요(웃음). 세 명의 아이도 저에게는 바꿀 수 없는 보물들이고요.”

부활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고교 시절 '희야'를 불러 여러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고, 훈련소에서도 그 노래로 장기자랑 1등을 했다고 한다.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1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문선대까지 부활 노래로 뽑혔었다는 인연을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 아쉬움은 그대로인가 보다. 노래를 계속하기 위해 군가도 한 옥타브 올려 불렀다는 에피소드를 말해 인터뷰를 웃음바다로 만든 그에게 앞으로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지금 연기를 시작한 아들이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음…. 저도 기회가 닿는다면 부활의 콘서트에 객원가수로 나가서 다시 한번 노래를 한번쯤 불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종일관 웃음이 가득했던 인터뷰. 22년 만에 처음으로 전하는 이야기. “노래를 다시 부르고 싶습니다”였다.

오석기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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