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간첩 자식' 꼬리표에 7남매 취업 못 해…식모살이로 생계 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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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진실 ‘동해안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 - 속초 ‘창동호' 선원들과 가족들의 피맺힌 삶

◇1971년 5월 속초 앞바다에서 멸치잡이에 나섰다 북한에 납치된 ‘창동호' 선장의 아들 김창권씨가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으로 피해를 당한 아버지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다. 속초=권태명기자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은 납북된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의 삶까지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1971년 5월 속초 앞바다에서 멸치잡이를 하다 북에 납치된 창동호 선원 5명은 1년이 지나 돌아왔다. 이들은 수사기관으로부터 혹독한 고문, 가혹행위를 당한 후 반공법,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다.

가족들은 고문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이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함께 고통을 겪었다. 창동호 사건의 선원들은 모두 고인이 됐지만 극심한 고통은 대를 잇고 있다. 자녀들은 연좌제에 얽혀 직업조차 갖지 못했다.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이유다. 창동호 선장의 아들 김창권씨 등 유족 4명은 현재 공권력의 인권 유린을 고발, 정부의 책임을 묻는 민사소송을 제기하며 힘겨운 투쟁 중이다.

고문에 피폐해진 아버지 지켜보며 고통, 일거수일투족 감시도

군 입대 후 '빨갱이 새끼' 취급 부대 내 강제 전출 수없이 당해

"반공법 만든 사람에 복수하고 싶어" 국가 상대로 힘겨운 투쟁

■고문 후 밤새 앓던 아버지의 고통=납북귀환어부들은 우리 수사기관의 고문 이후 사람답게 살 수 없었다.

창동호 선원 강재봉씨의 아들 강준기(71·속초시 영랑동)씨는 “아버지는 고문과 폭행을 당한 후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됐다. 한창 나이인 66세에 돌아가셨다”며 억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관장 송흥룡씨의 딸 송화자(66·여·속초시 조양동)씨 역시 “고문 이후 아버지는 소변이 나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송씨의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매일 술을 마셨고 횡설수설했다. 잠을 자고 있는 가족들을 깨워 말을 걸면서 모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김창권(71·속초시 동명동)씨의 아버지인 선장 김봉호씨는 사건 이후 다시 배를 몰 수 없었고 매일 술로 지새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입관할 때 김씨가 본 아버지의 몸은 새까맸다. 김씨는 고문을 당하고 맞았던 흔적이 죽어서도 남은 것이라 믿고 있다.

■납북 후 송두리째 뽑힌 가족의 일상=창동호 선원들이 북에서 돌아온 이후 가족들의 일상도 완전히 변했다. 납북귀환어부 당사자와 가족들은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에 올랐다. 거주지를 옮기거나 고향에 다녀오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집 앞에도 감시하는 이들이 있었다.

김창권씨는 군 제대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집 앞에서 감시하던 경찰을 발견했다. 어릴 적 친구였다. 김씨는 “친구 역시 윗선의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씨는 ‘간첩의 자식'이라는 비난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강준기씨는 부친의 납북 피해로 군 입대 후 부대 내에서 강제전출을 5번이나 겪었다. 강씨는 “나를 ‘빨갱이 새끼'로 취급했다. 나를 못 믿겠다고, 남들은 한 번도 할까 말까 한 전출을 수도 없이 당한 것”이라고 분노했다.

■피해의 대물림, 연좌제의 늪=‘간첩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는 강력한 족쇄였다. 창동호 선장의 자녀인 7남매는 모두 취업을 하지 못했다. 김창권씨는 “7남매 모두 신원조회의 문턱을 넘지 못해 직장에 다니지 못했다. 동생은 입사 직전 조회에 걸려 일을 포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송화자씨는 고문 피해로 일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린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16살 나이에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송씨의 남동생은 14살 나이에 오징어 배에 올라야 했다. 강씨도 먹고살기 위해 20대에 공사판에서 일을 시작했다. 직업을 구하지 못해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하루도 쉬는 날 없이 공사 일을 하고 있다. 강씨 여동생들 역시 아버지가 납북됐다가 돌아온 이후 직장에 취업하는 것을 생각조차 못 한 채 허드렛일만 이어 왔다.

■반세기 동안 억눌린 한, 정부 상대 투쟁=이들에게서는 50년의 세월 동안 쌓아 온 억울함과 울분이 느껴졌다. 강씨는 “못 배워도 할 말은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반공법을 만든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다. 아버지가 북에 가려고 한 것도 아니고 고성 아야진 바다에서 납치됐다. 죄 없는 사람을 월북한 것으로 조작하고 고문을 했는데 한이 맺히겠나 안 맺히겠나”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들은 억울함을 풀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맞섰다. 2014년 춘천지법 속초지원에 재심을 신청해 6년 만인 지난해 12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부친이 납북된 지 49년 만이었다. 그리고 동해안 납북귀환어부들 중 최초로 정부에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보상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라며 민사소송을 제기, 다음 달 7일 판결을 앞두고 있다. 만약 이들이 승소한다면 동해안 납북어부의 피해와 정부의 잘못을 포괄적으로 인정하는 첫 판례가 된다.

■억울한 피해자, 용기를 내 달라=정부가 씌운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피해 당사자가 아닌 자녀라는 점에서 더 어려운 일이었다. 김창권씨는 “한 분이라도 생존했다면 (명예회복이) 조금 더 빨랐을 거다.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국가에 맞서 투쟁을 하니 힘에 부쳤다”고 밝혔다. 강씨는 “희망 반, 포기 반인 상태였다.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감개무량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에 무죄로 판결받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이야기를 못 듣고 가신 게 너무 아쉽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그래도 북에 끌려갔던 사람이 아직 살아있지 않나. 우리를 통해 이분들이 세상 밖으로 나설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최기영·이현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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