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일반

[원선영 기자의 인사]이영희 "오자매 중 맏딸 아버지의 큰 기대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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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로펌 최초 `유리천장' 깬 화천 출신 이영희 바른 대표

◇이영희 법무법인 바른 대표 변호사가 지난 6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사무실에서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신세희기자 ◇본보 2010년 12월1일자 사회면에 보도된 '화천 딸부잣집 딸 셋 사법시험 합격' 기사. 큰딸 이영희 대표 인터뷰 내용이 담겼다.

그곳에선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펼쳐진 노트의 글씨를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사락사락' 눈송이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긴 밤의 중턱에 와 있었다. 차곡차곡 포개진 눈이 어린아이 손 한 뼘만 해질 즈음이면 아버지는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대문을 나섰다. 반짝이는 눈밭을 한참 걸어 동네 어귀에 있는 슈퍼에서 따끈한 호빵 몇 개를 산 다음 온 길을 서둘러 돌아왔다. 그리고 늦은 밤 공부하는 딸을 찾았다. “배고픈데 이거 먹고 해.”

이영희(50)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의 고향은 이렇게 남아 있다. 유난히 많이 내리던 눈. 지각일까 맘 졸이며 숨차게 뛰었던 등굣길. 친구들과 개울에서 잡았던 물고기 몇 마리. 그리고 눈 오는 날 아버지가 사다주신 호빵. 생각만 해도 따뜻한 곳, 그의 고향 강원도 화천 사내면이다. 지난 6일 서울 강남에 있는 법무법인 바른 사무실에서 국내 10대 로펌 최초로 대표에 오르는 이 변호사를 만났다.

공채 1기 입사 22년만에 대표

1997년 사법시험 합격 후

법원·검찰 안 거치고 로펌行

'이용호 특검' 합류는 행운

'여성 최초' 수식어 부담 돼

너무 잘하려 하지 말자 생각

회사와 함께 성장, 값진 경험

산골마을 소녀의 도전기

"여성도 법조인 될 수 있다"

아버지가 인생의 길라잡이

덕분에 더 넓게 머리 내다봐

고향 화천은 참 따뜻한 곳

나중에 거기에 집 지어 놓고

가끔씩 쉬러 가고 싶어요

■대형 로펌 최초 여성경영대표 변호사

이 변호사는 내년 1월1일 법무법인(유한) 바른의 경영대표변호사로 공식 취임한다. 올 9월 바른 소속 파트너 변호사 130여명의 선택을 받았고, 내년 임기를 준비하며 연말을 보내는 중이다. “쉽게 말해 내부 살림을 이끌어 가는 역할이라고 보면 돼요. 우리 로펌은 총괄대표 1명과 경영대표 변호사 2명 등 3명이 함께 운영하는데 저는 인사와 노무를 맡게 됐어요. 거창한 포부보다는 사회 변화에 맞게 조직을 정비하는 작업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임직원 420여명 규모의 국내 대형 로펌에 여성이 경영대표변호사로 취임하는 건 이 변호사가 처음이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영광스럽기도 하지만 부담도 되지요. '여자 대표가 하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라는 평가가 나올까 봐 걱정되는 게 사실이에요. 제가 '최초'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잣대나 기준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은 해요. 그래서 주변의 동료와 선배들에게 응원 부탁을 많이 했어요.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라는 조언과 격려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변호사는 1997년 사법시험에 합격 후 검찰·법원을 거치지 않고 곧장 신생 로펌인 바른에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이후 단 한 번도 한눈 팔지 않고 바른에서 다양한 경험과 실력을 쌓았다. “변호사로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너무 좋았어요. 송무변호사를 하고 싶었는데 인품 좋은 선배 변호사들이 잘 이끌어주셨죠. 후배들이 경험을 쌓을 수 있게 '이용호 특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적극 추천해 주시기도 했어요. 어딜 가나 일 힘든 건 똑같지만 생각이 바르고 멋진 분들과 일하는 건 행운이죠.”

어쏘 변호사(Associate Lawyer), 파트너변호사를 거친 그는 2018년 운영위원이 됐고 입사 22년 만에 경영대표에 오르게 됐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런 제가 '바른'에 와서 성장하고, 배우고, 야단도 맞았죠. 좌충우돌 했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꼈어요. 무엇보다 제가 성장한 만큼 우리 로펌도 큰 성장을 했잖아요. 소속 집단과 스스로가 함께 성장해 나간다는 건 값진 경험인 거 같아요. 인생에서 경험하기 힘든 일이죠.”

■산골마을 소녀의 도전…“아버지의 큰 꿈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죠”

여성 최초의 대형 로펌 경영변호사 성공신화를 들으니 자연스럽게 이 변호사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다. 산골마을에 살던 그 시절, 그녀는 어떤 꿈을 꿨을까. “제 꿈은 '당연히' 법조인이었어요. 아버지가 아주 어릴 때부터 법조인에 대한 얘기를 어마어마하게 했거든요. 신문에 여성이 사법고시에 몇 명 합격했다는 기사가 실리면 그걸 오려서 보여주시곤 했죠. 자연스럽게 법조인을 꿈꿨고, 당연히 법학과에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의 이 변호사가 법조인의 길을 걷도록 인생의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이 변호사는 “아버지의 꿈도 법조인이셨는데 형편이 안 좋아서 결국 직업 군인의 길을 택하셨어요. 원래는 아들을 낳아 법조인을 만들려 했는데 딸만 5명이 태어나서 목표를 바꾸셨죠. '괜찮아, 딸도 할 수 있어'라고요.”

맏딸인 이 변호사에게 그의 아버지는 기대를 많이 걸었다. 작은 시골마을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그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더 넓게, 멀리 보고 도전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 덕분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나,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왔는데 아버지가 '우리 영희는 법조인 시키겠다'고 말씀하셨대요. 선생님이 가시면서 그러시더라고요. '영희야, 아버님 꿈이 커서 네가 힘들겠다' 하하. 아직도 그 기억이 선해요”

아버지는 늘 든든했다. 밤늦게 책상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와 간식을 챙겨주고, 격려했다. “시험공부를 하고 있으면 호빵이랑 아이스크림을 챙겨주셨어요. 가끔은 라면도 끓여주시고. 시골이니 가게에 가서 뭘 사려 해도 한참을 가야 하는데 그 밤에 가서 사오신 거죠. 눈은 왜 그리 자주 많이 오는지. 그때 그 시절, 그 마을은 아빠와의 추억 그 자체예요.”

열성적으로 딸의 꿈을 응원했던 그의 아버지는 이 변호사의 사법고시 합격 소식을 듣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래도 이 변호사는 아버지가 먼 곳에서 흐뭇해하실 거라 믿는다. 1997년 이 변호사를 시작으로 넷째·막내 동생까지 사시에 합격했다. 딸 다섯 중 셋이 아버지가 그렇게 소원하던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으니 이만하면 함박웃음 짓지 않으실까. “넉넉하진 않았지만 사내면은 아빠와의 추억이 많은 곳이에요. 별 보면서 앞으로 뭘 하겠다 하면서 미래를 그렸던 곳이고. 그래서 따뜻하고요. 우리 자매들끼리 나중에 거기서 집 지어 놓고 가끔 쉬러 가면 어떻겠느냐는 얘기도 자주 해요.”

이 변호사의 어머니도 마을에서 유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다섯 딸을 키우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했다. “단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기도를 다니셨대요. 눈보라가 치는 날에도 교회에 가서 우리 딸들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거죠. 항상 말씀하세요. 간절함이 많은 걸 바꿀 수 있다고요. 아버지가 저에게 꿈을 주셨다면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셨다고 생각해요.”

■“모든 일상에 감사…긍정과 공감이 나의 에너지”

어머니와 다섯 자매는 지금도 가까이에 산다. 동생들과 같은 직업을 가진 만큼 대화도 많이 하고 업무적으로 도움도 많이 받는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제 적성에 정말 잘 맞아요. 변호사를 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듣거든요. 돈 받고 하는 일인데도 오가는 마음이 있고, 저 스스로도 보람을 많이 느껴요.”

이 변호사의 최대 무기는 '공감능력'이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능력이 제 장점이라고 말씀해주시는 분이 많아요. 그런데 약간의 오지랖 같기도 해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도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하는 거죠. 조금 손해 보더라도 공감해주고, 격려해주고. 이런 저의 마음이 상대방에게는 위로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긍정적인 그의 성격은 일상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원래 소소하고 작은 일에 감사하는 편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도 잘 주무셨어요' 하고 인사할 수 있는 가족이 있는 것 자체로 저는 행복해요. 사랑하는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출근하고, 사무실에 오면 저를 지지해주는 동료들이 있어요. 이것만큼 행복한 게 있나요.”

원선영기자 haru@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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