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의 고리에 엮여 되풀이되는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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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 출신 이서진 장편소설 ‘밤의 그늘'

비극적인 역사의 시간을 뚫고 긴 세대에 걸친 악행이 드러난다.

고성군 거진 출신인 이서진 작가가 장편소설 ‘밤의 그늘'을 펼쳐보인다. 오랜 세월 반복된 어둠이 드디어 모습을 비춘다.

1932년 늦가을, 함경도 원산 내안이라는 마을에 한 여인이 찾아든다. 동네 잔치를 핑계 삼아 머물게 된 혼성 사당패의 일원이다. 일제의 핍박이 강하게 쏟아지던 시기, 여인은 오갈 데 없는 몸을 한 집안의 남자에게 의탁하고 곧 아이를 갖게 된다. 그리고 아이는 세 집안을 강하게 옭아매며 긴 애증의 시간으로 물들인다.

작품은 대를 이어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들을 주인공 ‘기준'과 그의 부인인 ‘선영'의 시점으로 그린다. 끔찍한 일의 당사자들은 이미 숨을 거둔 뒤다. ‘선영'이 우연히 알게 된 단서는 ‘월북무용가 유나타샤'에 대한 사진뿐이다. 이 작가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인간 욕망의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내는가하면 가족이라는 이름의 안타까운 팔자를 감정적으로 교차시킨다. 자식이 성장해 되풀이하는 윗 세대의 실수는 이들을 핏줄의 고리로 묶는 과정이다. 남북 이데올로기라는 역사적 차원을 넘어서 인물들의 운명이라는 존재론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대학 교수와 그의 부인, 스스로를 고매하다고 여기는 한 부부의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은 곳곳을 집요하게 조명한다. 이어 고여있던 시간들에서 비극을 끌어내 연속적인 플롯을 만들어낸다. 함께 봉인됐던 비밀들도 하나씩 형태를 갖추며 업보로 돌아온다. 하지만 작품은 고통스럽고 비도덕적인 전개를 이어가면서도 성찰과 관조의 태도를 보인다. 이야기가 지닌 원초적인 잔인성을 극대화시켜 분노와 폭로를 표출하기보다는 ‘통찰'이 가진 힘을 알린다.

이서진 작가는 “마무리된 책 속의 많은 바람이 제대로 형상화됐는지에 대해 규정하고 싶지 않다”며 “그저 다양한 개체가 품었던 각기의 소망들을 밖으로 꺼내려했다는 사실만 오롯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원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수료했으며, 2006년 ‘문학마당'으로 등단했다. 김만중문학상과 원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도화 刊. 280쪽. 1만3,000원.

김수빈기자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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