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강원의 맛·지역의 멋]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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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실레이야기길

◇하늘에서 바라본 춘천 실레이야기길. 김남덕기자

금병산 자락 자리 잡은 김유정 작가 고향

그의 작품들 10여편 배경이 된 ‘실레마을'

산길·마을길 거치는 5.2㎞ 실레이야기길

춘천 8개의 봄내길 가운데 1코스에 해당

딱히 숨 차오르게 할 언덕 없어 쉽게 완주

가슴 한가득 피톤치드·시원한 바람 담아

단언컨대, 수많은 길 중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을 대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이곳을 말할 것 같다. 굳이 별도의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필요하지 않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길을 꼽으라고 하면 그중에서도 최고가 아닐까 싶다. 춘천의 ‘실레이야기길'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30년대 이곳에 살았던 소설가 김유정(1908~1937년)이 기록해 둔 실레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산길, 골골마다 스며들어 흙길에, 나무에, 또 풀잎에 알알이 박혀 있으니 말이다.

실레이야기길은 춘천에 있는 8개의 봄내길 가운데 1코스에 해당한다. 산길, 마을길을 거치는 5.2㎞ 구간에 조성돼 있는데 금병산 기슭을 타고 실레마을 뒤편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내리면 큰 힘 들이지 않고 완주할 수 있다.

김유정이 남긴 문학적 자산이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실레마을이다. 금병산 자락에 자리 잡은 김유정 작가의 고향. 춘천시 신동면 증리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수필 ‘오월의 산골작이'에 나오는 것처럼 떡시루를 닮았다고 해 실레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현재의 지명인 증리의 한자도 시루 ‘증(甑)'을 붙이고 있으니 나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유정의 작품 가운데 10여편의 배경이 된 곳이 이 마을이다.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김유정의 작품세계인 셈이다. 언덕배기에 솟아 있는 김유정문학촌이 ‘문학관'이 아닌 ‘문학촌'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실레마을 안을 거닐다 보면 김유정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의 장소들을 쉼 없이 만날 수 있다. 그런 곳을 둘러싸고 있는 길이 실레이야기길이니 아름다운 풍광들이 길에 오르는 이유의 전부인 다른 길들과는 분명 느낌이 다르다.

김유정문학촌 앞 삼각형 모양의 교통섬 오른쪽 꼭짓점 방향을 화살표 삼아 몇 발자국 꾹꾹 밟고 걸으면 나무로 만들어진 ‘김유정 실레이야기길' 표지판 앞에 서게 된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그 옆 회색 푯말. ‘실레이야기길 전망대 2.9㎞' 방향을 따라 일단 출발이다. 아직 겨울 색을 미처 털어내지 못한 지난 15일의 일이다.

실레마을은 산 안에 폭 안겨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실레이야기길을 시작하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녹색의 병풍이 빙 돌아가며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다. 어딘가에서 불쑥 점순이가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길은 아스팔트의 회색에서 흙의 옅은 갈색으로 낯빛을 자유롭게 바꾸며 금병산 방향으로 우릴 인도한다. 책과 인쇄 박물관을 지나치면 본격적으로 산길에 들어갈 채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길 끝에 느닷없이 차가 빠르게 내달리는 도로(순환대로)가 나타난다.

“길을 잘못 들었나.” 당황을 채 끝내기도 전 급하게 우회전(정족리출발점)하며 실레이야기길 본진에 진입, 이제부터 산길로 향한다. 이내 폭신폭신한 흙길이 이어진다. 조금 전과는 또 다른 고즈넉한 풍경이 스르륵 펼쳐진다.

길은 굵직굵직한 나무들을 호위병으로 세워두고 적당한 경사를 유지하며 하늘 방향으로 이어진다. 길 위에 박혀 있는 돌멩이들이 유독 많은데 간혹 솟아난 돌멩이 머리가 발끝에 차이면서 살짝 거슬리기도 하지만 걷기 거북할 정도는 아니다.

길을 올라가다 보면 왼편으로 운동기구들을 모아 놓은 쉼터 같은 곳이 하나 보이는데 이곳을 기점으로 왼편으로 올라가면 금병산 정상으로 향하게 되고 직진하면 그대로 실레이야기길 코스를 걷게 된다.

길은 딱히 숨을 헐떡이게 하는 언덕배기도 없고 참으로 착한 경사, 일관된 난이도가 이어진다. 이러구러 오르다 보면 잠시 후 평지에 도착. 저쪽에 작은 벤치가 보이는데 쉴까 말까, 그러다 다시 길에 오르려는 찰나, 나타난 다리. 산속에서 만나는 작은 콘크리트다리. 폴짝 뛰면 넉넉하게 뛰어넘을 정도의 길이다. 특이하다. 이번엔 제법 등 뒤로 중력이 느껴지는 경사가 산으로 이어지는데 이 걸음 끝에 항상 통행을 제한한다는 푯말을 만나고 발길을 돌리거나 경로를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휴식년(2020년 1월1일~2021년 12월31일)이 끝나고 이제 통행이 자유로우니 녹색의 향연 속으로 그대로 풍덩 해 본다.

기분 탓이겠지만…, 뭔가 좀 더 실해진 느낌이랄까. 맘껏 피톤치드를 가슴 한가득히 담아본다. 실레이야기길 전망대 도착. 순간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한 움큼 베어 물어본다. 바람 사이로 알싸한 동백꽃 내음이 섞여 밀고 들어오는 듯하다. 여기가 이 길의 중간 지점쯤 될까.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은 듯 하다. 오솔길을 거치고 분기점. 왼쪽 길이 금병산 정상. 다시 한번 직진. 쉼터에 앉아계신 어르신들과 눈인사. 바로 내리막. 그야말로 끝내주는 정취의 연속이다. 올라올 때 만났던 풍광과도 사뭇 다른 모습이다. 게다가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길에 졸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와도 조우한다.

따가운 봄볕 사이로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과 청아한 자연의 소리, 오랜만의 호사다. 저수지를 오른편으로 낀 채 산길을 벗어나 다시 아스팔트 위에 착륙한다.

그리고 중력 방향으로 몇 발자국 더 아래. 실레책방 마당에 앉아 막 내린 커피 한잔.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이제 정말 ‘봄봄'인가 보다.

오석기기자 / 편집=이상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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