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금요칼럼]실현 가능한 상상하기

홍경한 강원국제비엔날레 예술총감독

한 자(尺) 남짓한 아이의 보폭으론 산중의 사찰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하지만 석가탄신일이 아니면 그 보배롭기 짝이 없던 '바나나'를 먹을 수 없었기에 목구멍까지 숨이 찰 정도로 걷고 또 걸었다. 해마다 그랬다. 바나나를 먹어야 한다는 뚜렷한 집념은 그렇게 50리 길도 마다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해변에 잔뜩 핀 해당화와 땅속 깊숙이 박힌 칡뿌리는 화수분과 진배없었다. 자기 키만큼 캔 그놈들을 매고 끌어 면에 위치한 한약방에 팔면 돈 몇 푼을 쥘 수 있었다. 한데 그 얼마 되지 않는 푼돈조차 가치는 컸다. 늘 뙤약볕에서 소작하던 조모의 살림살이에 보탤 수 있었고 하맹방리 유일의 구멍가게였던 '대섭이네'에서 약간의 과자 부스러기도 살 수 있었다.

모두 어렵고 가난하던 1970년대, 그땐 그랬다. 지금이야 흔한 과일이지만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바나나 하나는 열 보석 안 부러울 정도로 귀했다. 산과 강, 바다와 들판에 널린 온갖 동식물은 꽤 쏠쏠한 용돈벌이였고, 누군가에겐 생존을 잇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허나 강원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컸다. 아니, 전후 세대이거나 보릿고개라는 단어를 접하고 자란 한국 사람들은 다들 그랬다. 그야말로 참으로 없었고 뭐 하나 충분하지 않던 시절에 태어나 밀레의 '이삭줍기' 처럼 주인이 떠난 밭에 쪼그리고 앉아 당근이나 땅콩을 훑었고, 면사무소에서 배급하던 밀가루 두어 포대를 받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산등성이를 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궁핍과 허기가 반드시 희망을 접게 하는 건 아니었다. 필자에게 있어 곤궁한 현실은 오히려 스스로 개척하는 법을 가르쳤고,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했다. 물론 정서적 안정과 예민한 감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서적 안정과 감성을 말함에 특히 강원의 자연은 특별했다. 가시적이지 않은 세계를 관찰케 하는 자연의 호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마음과 사고의 깊이에 간극을 부여했고, 사유의 여백을 일깨우는 배경이었다. 모종과 수확이라는 계절의 이치는 땀의 공간에서 삶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현재와 미래로 작동했으며, 가을을 수놓던 반딧불과 홍수를 이룬 별은 신비롭고 영묘한 이미지의 원천이었다. 자연으로부터 배웠으며 삶의 조타를 찾았다. 긴 시간이 흘러 최근 어린 시절을 보낸 강원의 구석구석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허나 수십 년의 공백은 많은 것을 벌려 놨다. 신작로는 대로로, 사시사철 인적 없던 '맹방'은 인파에 지쳐버린 해수욕장으로 탈바꿈했다. 반딧불 밑에서 책을 읽던 기억은 이제 아무도 믿지 않는 타인의 의심 속에 더욱 크게 부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강원도에 들어서면 뭔가 알 수 없는 안정감이 든다.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태생에 관한 것일 수도, 자연과 삶의 공동체, 역사성을 텃밭으로 한 심리적 측면의 부합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예나 지금이나 강원도, 그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은 내게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미지를 창출하고 실현 가능한 꿈을 갖게 한다는 사실이다. 2018년 2월3일 개막하는 '강원국제비엔날레'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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