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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사라지는 종이통장

종이통장이 2년 후부터 사라진다. 금융 당국이 2017년 9월부터 종이통장을 발급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1897년 한성은행(조흥은행의 전신)이 설립된 이후 120년 만이다. 월급이 들어오는 통장을 보는 즐거움도 옛날로 남게 됐다.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의 기억이 묻어 있는 종이통장이다. 새삼 소회가 밀려온다.

▼월급이 통장으로 송금되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 정부 시절부터다. 공무원 사회부터 시작됐다. 남편의 월급이 곧바로 아내의 손으로 들어갔다. 전(錢)의 힘을 잃은 남편들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하지만 고스란히 가족에게 가는 월급은 가정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제는 어느덧 남편의 월급이 주부의 것이라는 데 모두 동의하는 세상이 됐다.

▼ 그 이전 매달 급여는 노란 월급봉투로 받았다. 그래서 노란 봉투에 얽힌 사연도 많았다. 가불로 월급봉투가 비면서 일어나는 부부 싸움은 다반사였다. 월급봉투를 받으면 '너도 나도 소매치기 조심'은 불문율이다. 아버지가 월급봉투를 가져온 날, 그날은 가장의 권위와 아버지의 존재감이 가족들에게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특별한 날이었다. 하지만 월급이 통장으로 송금되면서 그날의 의미는 점차 잊혀져 갔다.

▼종이통장은 서민들의 희망이었다. 근로자재산형성저축의 약칭인 재형저축은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6년 도입됐다. 한때 3년 만기 재형저축 금리는 33%대에 달했다. 월급봉투엔 재형저축 항목이 따로 있었다. 이 돈으로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했다. 잘살 수 있다는 꿈이 담겨 있었다. 미국은 1990년대, 영국은 2000년대 들어 종이통장을 발행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아날로그 세대에게는 아직 통장이 익숙하다. 그래서 사라진다는 게 불안하기도 하다. 편지를 부치던 빨간 우체통과 삐삐를 받고 달려가던 공중전화가 생각난다. 조용히 사라져 가는 것들이다. 가로 14cm, 세로 9cm의 종이통장도 그 길을 걷게 됐다.

박종홍논설위원·pjh@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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